황해도에서 내려온 피난민이었던 제 부친께서 전쟁 후 자리 잡은 천호동은 광나루 바로 북쪽의 높은 아차산 절벽이 한강의 흐름을 가로막는 광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입니다.

거기서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자라난 저는 한강의 흐름이 방향을 바꾸는 그 아차산 높은 절벽의 기억을 항상 뇌리에 담고 있습니다. 저 강원도 산간벽지에서부터 흘러나온 한강물이 평야로 흘러들어 양수리에서 합쳐지고 미사리를 지나 광나루에 이르기 전, 강력히 마주 선 그 절벽 앞에 도달하면 강물은 방향을 바꾸어 뚝섬, 잠실 쪽으로 평야를 덮어가며 도도한 흐름을 계속하는 것입니다. 그 넓은 한강 남쪽의 평야를 촉촉이 적셔 주며 생명을 일으키다가 드디어 한강은 확트인 해방과 자유의 대양으로 강물의 흐름을 넘겨줍니다. 강변에서 성장한 소년답게 제 머릿 속에 담겨 있는 장엄한 한강물의 흐름이 많은 삶의 교훈을 안겨 줍니다.

신앙 생활도 마찬가지이고 특별히 기도의 흐름도 이와 같은 진리인 것을 깨달을 때가 있습니다. 강물은 언제나 일직선이 아닙니다. 강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을 찾아 흐르며 막히는 곳에 이르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평야에 새 물길을 열어 갑니다.

영적인 사람들의 진리도 이와 같아서 신앙의 강물은 교만을 앞세우는 높은 곳에서 겸손한 낮은 땅으로 흘러들어 가며 세속화된 불신과 자만심의 절벽을 만나면 스스로 방향을 바꾸어 논과 밭의 생명을 키워주도록 평야를 찾아 흐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겸손과 비전을 강바닥으로 삼아 흘러가는 신앙의 강물이요, 기도의 강 흐름입니다.

저는 최근 뉴욕의 한 교회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기도의 물결이 이와 같음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됐습니다. 한국교회들을 깨우며 북한의 동족들을 살리기 위해 흘러가던 국토기도대장정의 강물이 단단한 절벽 앞에 부딪히면서 어느새 그 물길을 돌리고 방향을 바꾸었습니다.

오히려 그 기도의 강물은 해외 300인 목사단이라는 평야를 지나게 되었고 세계 51개 도시에서 탈북자 북송 반대의 도도한 강물의 흐름을 계속하면서 탈북자들을 살려내는 생명의 강물로 변하고 있습니다. 할렐루야!

기도의 강물은 도도한 흐름이지만 도처에서 바위를 만나고 절벽을 만납니다. 그러나 그 막힘 때문에 강물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절감하게 되는 것은 기도의 강물은 막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생명을 살리는 평야 지대로 인도함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우리의 교회도 그렇습니다. 목마른 영혼이 계속 밀려 들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찾아 와 더욱 부흥하고 함께 기도하게 됩니다. 세계 선교도 그렇습니다. 전세계에 복음이 전파되는 길도 마치 이런 강물의 흐름과 같습니다. 누구도 기도의 강물을 막을 자가 없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그 강에 그저 배를 띠우고 함께 노를 저어 가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