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15-16절,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과 요단 강 저편 해변 길과 이방의 갈릴리여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놀랍지 않은가? 이사야 선지자 때 이미 주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곳이 이방의 갈릴리와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주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오셨고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으로 오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곳에 큰 빛이 비췰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 쪽으로 가시고 그 해변으로 가신 것은 어떻게 보면 우연 같은데 성경에서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움직이심은 우연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대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사렛에서 배척당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옮기셨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그분은 그곳으로 가셔야 했다. 고향 동네에서 배척당하시고 그분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가버나움으로 옮겨 가셨는데 그쪽으로 가셨기 때문에 그분은 거기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을 얻으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큰 빛이신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디에 앉아 있었는가? 흑암에 앉아 있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다 흑암이다. 앉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아무 소망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또 여러가지 좋은 게 많아도 다 흑암일 뿐이다. 그리고 사망의 땅이요 그늘이다. 그러한 곳에 빛이 비취었다고 했다.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때부터’는 언제부터를 가리키는가? 갈릴리로 오셨을 때부터이다. 이것을 볼 때 사역을 시작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 주님이 나사렛 곧 그분이 자라나신 곳에 계셨을 때에는 거기서 무언가 하시려고 해도 배척만 당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옮겨 오시자 그때부터 그분의 전파가 시작되었다. 그분의 전파는 요한의 전파와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는 3장에서 침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한 것을 본다. 주 예수님도 똑같이 그렇게 외치셨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새롭고 신기하고 다르게 전파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요한은 분명 주 예수님과 비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말대로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그가 전한 말을 그대로 이어서 하셨다. 주 예수님이 오실 때에 흑암에 빛이 비취게 되고 주 예수님이 오실 때에 천국이 오게 된다. 우리는 ‘주여, 어서 천국을 이뤄주시옵소서’라는 찬송을 부르는데 아직도 사망이 있고 흑암이 있고 공허함이 있다면 그건 아직 천국이 아니다.
나는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서로 믿는 이들 가운데 시기가 있고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고 그 마음 속에 복잡함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천국이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그러한 다툼과 분쟁이 있는 것은 다 흑암이고 사망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주 예수님의 빛이 필요하다.“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땅에 빛이 있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 있었다(창 1:1-2).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임하는가? 빛과 생명이신 주 예수님이 오실 때 천국이 임한다. 사실 천국은 주님 자신이다. 그분이 빛이시며 진리와 생명이시며, 하늘의 왕이시고 천국의 주인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에서야 천국이 시작되니까 주님도 세례 요한처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왜 천국이 임하지 않는가? 아직도 그 마음 속에서 주 예수님이 주장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마음 속에서 아직 예수님이 주인이 되지 않으신 것이다. 아직 고집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들의 원망, 핍박, 다투는 말 등 많은 억울한 것들을 마음 속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천국이 임하기 위해 누가 우리를 다스리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다스리실 때 거기에 천국이 있다. 주 예수님이 개인에게 임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있고, 가정에게 임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임하며, 교회에게 임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황량한 것이다. 그 반대로 개인의 마음 속에, 가정에, 교회에 주님이 거하시고 주인노릇을 하실 때 거기는 더 이상 사망이 없고 흑암이 없다. 공허도 없고 혼란도 없다. 분쟁도 없고 미움도 없다.
우리 찬송에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어디든지 예수님이 있어야 천국이 있다. 스불론, 납달리, 요단 강 저편 이방의 갈릴리 사람들이 왜 흑암에 앉아 있는가? 왜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가? 예수님이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실 때 거기에 천국이 왔다.
그래서 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다. 회개는 천국의 서곡이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에 회개가 있는 날이 그곳에 천국이 임하는 날이다. 주 예수를 우리 마음 속에 왕으로,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분께로 돌이키는 것이며, 다른 많은 것들을 따르고 탐닉하던 것에서 그리스도께로 전환하는 이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다음에 계속)
놀랍지 않은가? 이사야 선지자 때 이미 주 예수님이 사역을 시작하실 곳이 이방의 갈릴리와 스불론과 납달리 땅이 될 것이라고 예언한 것이다. 주 예수님은 나사렛을 떠나 가버나움이라는 곳에 오셨고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으로 오셨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곳에 큰 빛이 비췰 것이라고 했다. 여기서 우리는 그분의 이러한 움직임을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분이 나사렛에서 가버나움 쪽으로 가시고 그 해변으로 가신 것은 어떻게 보면 우연 같은데 성경에서는 우연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주님의 움직이심은 우연이 아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이미 예언한대로 그렇게 된 것이다.
우리가 생각할 때는 나사렛에서 배척당했기 때문에 그곳으로 옮기셨다고 하겠지만 아니다. 그분은 그곳으로 가셔야 했다. 고향 동네에서 배척당하시고 그분은 스불론과 납달리 지경 가버나움으로 옮겨 가셨는데 그쪽으로 가셨기 때문에 그분은 거기서 사역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또한 거기서 베드로, 요한, 야고보 등을 얻으실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큰 빛이신 주님이 오시기 전에 어디에 앉아 있었는가? 흑암에 앉아 있었다.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사람들은 다 흑암이다. 앉아 있다는 것은 거기에 아무 소망도 없이 그냥 주저앉아 있는 상태를 말한다. 그리스도가 없으면 아무리 돈이 많고 또 여러가지 좋은 게 많아도 다 흑암일 뿐이다. 그리고 사망의 땅이요 그늘이다. 그러한 곳에 빛이 비취었다고 했다.
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가라사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
‘이때부터’는 언제부터를 가리키는가? 갈릴리로 오셨을 때부터이다. 이것을 볼 때 사역을 시작하는 것에도 하나님의 주권이 있다. 주님이 나사렛 곧 그분이 자라나신 곳에 계셨을 때에는 거기서 무언가 하시려고 해도 배척만 당하셨다. 그런데 그분이 갈릴리 가버나움으로 옮겨 오시자 그때부터 그분의 전파가 시작되었다. 그분의 전파는 요한의 전파와 동일한 것이었다. 우리는 3장에서 침례자 요한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고 선포한 것을 본다. 주 예수님도 똑같이 그렇게 외치셨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은 무언가 다른 사람보다 새롭고 신기하고 다르게 전파하기를 원할 것이다. 그래야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요한은 분명 주 예수님과 비할 수 없는, 그 자신의 말대로 예수님의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러나 주 예수님은 그가 전한 말을 그대로 이어서 하셨다. 주 예수님이 오실 때에 흑암에 빛이 비취게 되고 주 예수님이 오실 때에 천국이 오게 된다. 우리는 ‘주여, 어서 천국을 이뤄주시옵소서’라는 찬송을 부르는데 아직도 사망이 있고 흑암이 있고 공허함이 있다면 그건 아직 천국이 아니다.
나는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면서 서로 믿는 이들 가운데 시기가 있고 분쟁이 있고 다툼이 있고 미움이 있고 그 마음 속에 복잡함이 있는 것을 본다. 그것은 천국이라고 할 수 없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천국은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고 했다. 그러한 다툼과 분쟁이 있는 것은 다 흑암이고 사망이다. 그러한 사람들에게는 주 예수님의 빛이 필요하다.“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 땅에 빛이 있기 전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흑암과 공허와 혼돈이 있었다(창 1:1-2). 그러면 천국은 어떻게 임하는가? 빛과 생명이신 주 예수님이 오실 때 천국이 임한다. 사실 천국은 주님 자신이다. 그분이 빛이시며 진리와 생명이시며, 하늘의 왕이시고 천국의 주인이시다.
그분이 십자가에 죽고 부활하시어 성령으로 사람들 마음 속에 들어오실 때에서야 천국이 시작되니까 주님도 세례 요한처럼 천국이 가까웠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오늘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왜 천국이 임하지 않는가? 아직도 그 마음 속에서 주 예수님이 주장하시지 않기 때문에 그렇다. 그 마음 속에서 아직 예수님이 주인이 되지 않으신 것이다. 아직 고집을 내려놓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들의 원망, 핍박, 다투는 말 등 많은 억울한 것들을 마음 속에서 내려놓지 못했다. 지금 우리 가운데 천국이 임하기 위해 누가 우리를 다스리는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셔야 한다. 주 예수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다스리실 때 거기에 천국이 있다. 주 예수님이 개인에게 임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있고, 가정에게 임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임하며, 교회에게 임할 때 거기에 천국이 있다. 주님이 계시지 않은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는 황량한 것이다. 그 반대로 개인의 마음 속에, 가정에, 교회에 주님이 거하시고 주인노릇을 하실 때 거기는 더 이상 사망이 없고 흑암이 없다. 공허도 없고 혼란도 없다. 분쟁도 없고 미움도 없다.
우리 찬송에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것이 바로 천국이다. 어디든지 예수님이 있어야 천국이 있다. 스불론, 납달리, 요단 강 저편 이방의 갈릴리 사람들이 왜 흑암에 앉아 있는가? 왜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 있는가? 예수님이 아직 그들에게 오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가 오실 때 거기에 천국이 왔다.
그래서 천국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회개는 다른 것이 아니다. 회개는 천국의 서곡이다. 개인이나 가정이나 교회에 회개가 있는 날이 그곳에 천국이 임하는 날이다. 주 예수를 우리 마음 속에 왕으로, 주인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 그분께로 돌이키는 것이며, 다른 많은 것들을 따르고 탐닉하던 것에서 그리스도께로 전환하는 이것이 곧 회개인 것이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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