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금의 정의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라면 누구나 당연히 드려야 할 도리임은 내가 구원 얻게 되기까지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대속이 있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 같은 구원의 복음을 내가 듣고 믿어져서 회개하고 구원얻게 되기까지 복음 전달을 위해서 엄청난 수고와 고생, 심지어 매를 맞거나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더러는 순교하면서까지 복음의 제물이 된 신앙 선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거듭난 내가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 지옥 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전도여행을 다니던가 아니면 헌금과 기도 후원으로 선교사의 후원을 하던가 해서 구원 얻은 자의 필수 사명인 전도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거듭나서 성령에 이끌리며 주님 계신 하늘나라 소망을 목적으로 살고 있다면 롬 14:7-8의 말씀처럼 ‘우리 중에 아무라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심에 아멘 하고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 6:19-20에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심에도 아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나’라는 존재가 몽땅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내가 지닌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기대하시고 기뻐하실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선히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소유물이니 내게 지니게 하신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일에 사용하도록 맡겨두신 주님의 것으로 관리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9장에까지 이어지는 내용으로 예루살렘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에 아가야 지방에 있는 고린도교회가 1년 전부터 연보를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을 이번에 실현해 달라고 디도 일행을 보내면서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의 극한 가난과 시련 중에서도 힘에 겨웁도록 많은 연보를 해서 도와 주었다면서 작정 헌금을 보내 달라는 편지 내용입니다.
2. 마게도냐교회들의 섬김의 본
빌립보교회는 두아디라 사람으로 자주 장사하던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고 바울 사도의 일행과 루디아의 헌신적인 전도로 영적인 부흥에다 선교에 힘써 (빌 4:15-19)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도 선교비 지원을 했고 데살로니가교회 세울 때에도 두 차례 선교 헌금을 보내 왔으며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에바브라디도 편에 선교비 기금을 보내 왔는데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으로 축복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께서 세이레 동안 전도하다가 그곳 유대인들의 행포로 쫓겨 났는데(행 17:1-10 참조) 살전 1장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정도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하여 모범이 된 교회로 성숙했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가 영적 부흥과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 과정에는 바울 사도로부터 받은 정통한 복음과 빌립보교회에서 몇 차례 재정 지원과 기도 후원이 있었음을 기억할 때 오늘도 역시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의 사역에 여러 교회나 성도들의 기도 및 재정지원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는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키며 훼방하기 때문에 바울은 아덴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상과 같이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바른 신앙으로 양육 받았기 때문에 바울의 세계 선교에 지속적인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데살로니가교회도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신망애의 균형잡힌 신앙으로 모범 교회가 되었고 베뢰아교회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진지한 열정으로 성경공부를 하며 신앙 인격과 성품이 신사적인 신앙으로 성숙되어 가면서 예루살렘교회를 구제하는 일에 힘에 겨웁도록 연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마게도냐교회들은 진리정통하고 성령충만하여 선교 사명이 불탔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성도의 헌금과 하나님과의 관계
미국의 어느 흑인교회에서 선교주일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선교로 구원 얻은 성도들과 성령받은 교회의 필수적 사명이라시며 주님의 지상명령인 영혼추수가 시급한 이때 우리 교회에서도 이 세상의 유혹과 쾌락의 길을 달리지 말고 다 같이 복음 들고 선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했을 때 신도 중 몇 분이 “Let’s go!”라고 했을 때 목사님께선 때가 급하여 복음을 들고 걸어다닐 여유가 없기 때문에 쫓아 다녀야 한다고 하시니 청중이 다 “Let’s run!” 하면서 달려 가자고 했답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은 걸어 가거나 달려 간다 해도 주님 재림 전에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다 복음을 전하자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 다녀야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역시 “Let’s fly!”라고 화답했지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러나 여러분 중엔 기업경영이나 직장에 메여 갈 수 없는 분들도 계실 터인즉 갈 수 있는 선교사들의 지원을 위해 선교헌금(Mission Offering)을 해 달라고 했더니 잠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중 형편이 나아보이는 어느 장로님께 “Elder, I know you are able to give, how much are you willing to offer?(장로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얼마를 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Yes, I can do it, but not now. Wait until later”(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좀 기다려 주십시요) 하더랍니다.
이같은 상황을 보면 교회에서 남들이 지원해 주는 선교비로 선교 여행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았으나 정작 선교 확장을 위하여 선교사에게 재정 지원을 하라고 할 땐 모두가 움츠리고 주머니를 닫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은 과연 어떠했는지 기도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혼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바치셨고 오늘 우리로 천국 소망을 얻게 해 주려고 믿음의 선배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쳐 희생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선교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는 투철한 사명의지로 투자와 희생을 각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Why do you obey and sacrifice yourself to the word of Jesus? (왜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복종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느냐)라고 물을 때 “I do that because He is my Lord, of course.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한 것)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Offering is a sacrifice. 헌금은 희생인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헌금은 하나님께 복을 심는 것과 같다고 고후 9:26에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자기 중심으로 사는 신도는 아까워서 드릴 수 없겠지만 진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라면 더 많이 드리고 싶고 섬기는 기쁨으로 살기 때문에 더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며 모든 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흐뭇하시게 해 드리고파 밤낮없이 몸부림 친답니다.
행 17:24-25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하셨으니 내가 지금 살아 있음도 주께서 내게 생기를 계속 공급해 주시는 덕분이며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도 주께서 자기 용도를 위하여 내게 맡겨 놓으신 것이니 주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 지체없이 선용해서 주님의 뜻을 잘 이루어 드립시다.
그리할때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했다며 선한 청지기상을 주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눅 12:19-21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셨으며 딤전 6:17-19에서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복락을 위해 믿어지는 믿음으로 삽시다.
헌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얻은 성도라면 누구나 당연히 드려야 할 도리임은 내가 구원 얻게 되기까지는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희생의 대속이 있었기 때문이요 또한 그 같은 구원의 복음을 내가 듣고 믿어져서 회개하고 구원얻게 되기까지 복음 전달을 위해서 엄청난 수고와 고생, 심지어 매를 맞거나 옥고를 치르기도 하고 더러는 순교하면서까지 복음의 제물이 된 신앙 선배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복음으로 거듭난 내가 새 생명을 얻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보니 아직도 복음을 듣지 못해 지옥 가고 있는 불쌍한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직접 전도여행을 다니던가 아니면 헌금과 기도 후원으로 선교사의 후원을 하던가 해서 구원 얻은 자의 필수 사명인 전도를 감당해야 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진실로 회개하고 거듭나서 성령에 이끌리며 주님 계신 하늘나라 소망을 목적으로 살고 있다면 롬 14:7-8의 말씀처럼 ‘우리 중에 아무라도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나니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하심에 아멘 하고 주님을 위해 살다가 죽어야 할 것입니다.
고전 6:19-20에도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하심에도 아멘 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나’라는 존재가 몽땅 그리스도의 피로 사신 하나님의 것이라면 내가 지닌 모든 것은 자동적으로 당연히 하나님의 것임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기대하시고 기뻐하실 일에 즐거운 마음으로 선히 활용될 수 있도록 하는 선한 청지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 자신이 주님의 소유물이니 내게 지니게 하신 모든 것은 내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지시하시는 일에 사용하도록 맡겨두신 주님의 것으로 관리해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본문의 말씀은 9장에까지 이어지는 내용으로 예루살렘교회가 경제적 어려움을 당하기 때문에 아가야 지방에 있는 고린도교회가 1년 전부터 연보를 하겠다고 약속했는데 그것을 이번에 실현해 달라고 디도 일행을 보내면서 마게도냐에 있는 교회들(빌립보, 데살로니가, 베뢰아)의 극한 가난과 시련 중에서도 힘에 겨웁도록 많은 연보를 해서 도와 주었다면서 작정 헌금을 보내 달라는 편지 내용입니다.
2. 마게도냐교회들의 섬김의 본
빌립보교회는 두아디라 사람으로 자주 장사하던 루디아의 집에서 시작되었고 바울 사도의 일행과 루디아의 헌신적인 전도로 영적인 부흥에다 선교에 힘써 (빌 4:15-19) 바울 사도가 마게도냐를 떠날 때도 선교비 지원을 했고 데살로니가교회 세울 때에도 두 차례 선교 헌금을 보내 왔으며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에도 에바브라디도 편에 선교비 기금을 보내 왔는데 이는 하나님이 받으실만한 향기로운 제물이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이라며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대로 너희 쓸 것을 채워 주실 것으로 축복하였습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바울께서 세이레 동안 전도하다가 그곳 유대인들의 행포로 쫓겨 났는데(행 17:1-10 참조) 살전 1장에 보면 데살로니가교회는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가 마게도냐와 아가야에서 모든 믿는 자들의 본이 되었다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할 것이 없다는 정도로 믿음과 사랑과 소망에 대하여 모범이 된 교회로 성숙했습니다. 이처럼 데살로니가교회가 영적 부흥과 성장을 이룰 수 있게 된 과정에는 바울 사도로부터 받은 정통한 복음과 빌립보교회에서 몇 차례 재정 지원과 기도 후원이 있었음을 기억할 때 오늘도 역시 선교사들이나 목회자들의 사역에 여러 교회나 성도들의 기도 및 재정지원으로 복음이 확장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게 됩니다.
베뢰아 사람들은 데살로니가 사람보다 더 신사적이어서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믿는 사람이 많고 또 헬라의 귀부인과 남자가 적지 아니했는데 데살로니가의 유대인들이 베뢰아까지 와서 소동을 일으키며 훼방하기 때문에 바울은 아덴으로 가야 했습니다.
이상과 같이 빌립보교회는 사도 바울에 의해 세워졌고 바른 신앙으로 양육 받았기 때문에 바울의 세계 선교에 지속적인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데살로니가교회도 더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신망애의 균형잡힌 신앙으로 모범 교회가 되었고 베뢰아교회도 짧은 기간이었지만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진지한 열정으로 성경공부를 하며 신앙 인격과 성품이 신사적인 신앙으로 성숙되어 가면서 예루살렘교회를 구제하는 일에 힘에 겨웁도록 연보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마게도냐교회들은 진리정통하고 성령충만하여 선교 사명이 불탔기 때문인 것입니다.
3. 성도의 헌금과 하나님과의 관계
미국의 어느 흑인교회에서 선교주일에 목사님이 설교를 하시면서 “선교로 구원 얻은 성도들과 성령받은 교회의 필수적 사명이라시며 주님의 지상명령인 영혼추수가 시급한 이때 우리 교회에서도 이 세상의 유혹과 쾌락의 길을 달리지 말고 다 같이 복음 들고 선교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했을 때 신도 중 몇 분이 “Let’s go!”라고 했을 때 목사님께선 때가 급하여 복음을 들고 걸어다닐 여유가 없기 때문에 쫓아 다녀야 한다고 하시니 청중이 다 “Let’s run!” 하면서 달려 가자고 했답니다.
계속해서 목사님은 걸어 가거나 달려 간다 해도 주님 재림 전에 지구촌 구석구석까지 다 복음을 전하자면 비행기를 타고 날아 다녀야 한다고 했을 때 그들은 역시 “Let’s fly!”라고 화답했지요. 그래서 목사님은 “그러나 여러분 중엔 기업경영이나 직장에 메여 갈 수 없는 분들도 계실 터인즉 갈 수 있는 선교사들의 지원을 위해 선교헌금(Mission Offering)을 해 달라고 했더니 잠잠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중 형편이 나아보이는 어느 장로님께 “Elder, I know you are able to give, how much are you willing to offer?(장로님은 하실 수 있잖아요. 얼마를 해 주시겠습니까?) 라고 했더니 “Yes, I can do it, but not now. Wait until later”(네, 제가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좀 기다려 주십시요) 하더랍니다.
이같은 상황을 보면 교회에서 남들이 지원해 주는 선교비로 선교 여행을 하겠다는 사람은 많았으나 정작 선교 확장을 위하여 선교사에게 재정 지원을 하라고 할 땐 모두가 움츠리고 주머니를 닫는 모습을 보면서 나 자신은 과연 어떠했는지 기도해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영혼구원을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목숨을 바치셨고 오늘 우리로 천국 소망을 얻게 해 주려고 믿음의 선배들이 온갖 고생을 하며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쳐 희생했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도 선교를 위해서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는 투철한 사명의지로 투자와 희생을 각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Why do you obey and sacrifice yourself to the word of Jesus? (왜 당신은 예수님의 말씀을 복종하여 스스로를 희생하느냐)라고 물을 때 “I do that because He is my Lord, of course. (그분은 나의 주님이시기 때문에 당연한 것)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겠습니까?
Offering is a sacrifice. 헌금은 희생인 것 같습니다만 그러나 헌금은 하나님께 복을 심는 것과 같다고 고후 9:26에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고 하셨습니다. 아직도 자기 중심으로 사는 신도는 아까워서 드릴 수 없겠지만 진짜 하나님 중심으로 사는 성도라면 더 많이 드리고 싶고 섬기는 기쁨으로 살기 때문에 더 드리지 못함을 안타까워 하며 모든 생활이 주님을 기쁘시게 영화롭게 흐뭇하시게 해 드리고파 밤낮없이 몸부림 친답니다.
행 17:24-25에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하셨으니 내가 지금 살아 있음도 주께서 내게 생기를 계속 공급해 주시는 덕분이며 내가 무엇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도 주께서 자기 용도를 위하여 내게 맡겨 놓으신 것이니 주님의 뜻을 위하여 사용해야 할 기회가 왔을 때 지체없이 선용해서 주님의 뜻을 잘 이루어 드립시다.
그리할때 청지기 사명을 잘 감당했다며 선한 청지기상을 주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눅 12:19-21에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하신 말씀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딤전 6:10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하셨으며 딤전 6:17-19에서는 ‘네가 이 세대에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 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하심을 믿고 하나님의 영광과 영생복락을 위해 믿어지는 믿음으로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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