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답”(答)이 많은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소위 “포스트모던”(Post-Modern) 시대입니다. “정답(正答)은 오직 하나 만 존재한다”는 기존의 가치 체계를 부정하고 여러 개의 답을 주장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답”이라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도 합니다.

획일화(劃一化)되고, 정형화(定形化)된 일방적인 결론을 거부합니다. 제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방식”을 통해 “자기가 원하는 답”을 만들어 내는 시대입니다. 답이 틀려도 좋습니다. 개인이 만족할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한 “답”이 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정답”이 필요한 시대가 아니라 “해답”(解答)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고정된 정답”을 찾으려고 다투고 분쟁하면서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지극히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오히려, 당면한 문제를 적절하게 해결할 수 있는 “해답”을 구하는 것이 지혜로운 자세입니다. 대안(代案)이 없는 “정답”은 답이 없는 것과 똑같습니다. 아무리 옳은 것이라고 해도 탁상공론과 말싸움을 낳을 뿐입니다.

고지식하게 “정답” 타령만 하기 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면서 함께 머리를 맞대고 “해법”을 찾고, “해답”을 발견해 가는 것이 더 현명한 삶의 자세일 것입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절대적인 권위를 자랑하던 수학 참고서가 있었습니다. “수학정석” (數學定石)이란 책입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고등학교에 진학하면 마치 운명처럼 이 책을 만납니다. 그리고 이 지긋지긋한 괴물과 고등학교 시절 3년을 씨름하며 보내야만 합니다. 낮잠 잘 때 베개로 사용하면 딱 좋을 두께의 무거운 책입니다. “수학정석”은 언제나 일목요연하게 잘 정리된 “문제”와 “풀이과정” 그리고 “정답”을 알려 줍니다. 학생들은 거의 암기하다시피 문제들을 반복해서 풀고 또 풉니다.

한마디로 수학 정석은 수학의 바이블이었습니다. 하지만, 요즘에는 이 “정석”이 인기를 잃어가고 있습니다. 새로운 “해법”(解法)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하나의 획일화된 정답을 요구하는 문제보다는 새로운 해답을 요구하는 문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제는 응용력이 필요합니다. 습관처럼 오고 가던 길을 반복하는 “정답 수학”이 아니라, 낯선 길을 찾아가는 “해법 수학”을 인정해 주는 시대가 된 것입니다.

제 각기 다른 사람이 모인 곳이 교회입니다. 생각하는 방식이나 행동하는 모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특히, 이민교회는 어떤 경우에 공통분모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서로 다른 사람들의 규합체입니다. “미국이라는 세상에 얼마나 동화되었느냐?”에 따라서 그 차이의 심도는 한층 깊어집니다. 그리고 “결혼한 배우자가 어떤 사람인지?”“다양한 문화 속에서 어떤 공동체에 소속되어 살아 왔는지?” 실로 많은 다양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들이 살아가는 이민교회입니다. 그래서 “교회는 반드시 이런 곳이어야 한다”는 “정답”을 갖는 것이 위험합니다.

옛날에 “프로크루테스”라는 강도가 자신의 침대에 지나가는 행인들을 눕혀보고 침대보다 키가 크면 침대에서 삐져나온 다리를 자르고, 반대로 키가 작으면 침대에 맞추어 잡아 당겨서 죽였다고 합니다. 프로크루테스처럼, 자기의 기준을 능가하면 함부로 잘라내고, 그 기준에 미달되면, 앞 뒤 가리지 않고 잡아 뽑는 행위는 결코 옳은 신앙인의 자세가 아닙니다. 겸손하게 주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하면서 대화와 협력을 통해 서로 간의 “해답”을 찾아내는 폭 넓은 삶의 자세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