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순서 첫 번째가 소명이라고 했다. 이 소명은 외적 소명과 내적 소명으로 구분되는데, 내적 소명을 유효한 부름이라고도 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권적으로, 신비하게, 친히 사람의 영혼 속에 초자연적으로 역사하신 결과, 오관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그 사람이 마침내 마음의 귀를 열어 하나님의 부름을 들을 수 있게 되어 하나님의 그 부름에 합당한 반응을 보일 수 있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부르시는 하나님의 부름을 마음의 귀를 열고 들을 수 있는 그 사람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의 영혼 속에 어떤 신비한 변화를 일으키신 것일까?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구원의 서정 두 번째가 된다.

구원의 서정에서 이 내면적 영혼의 신비한 변화를 중생, 또는 거듭남이라고 부른다. 몸의 오관을 통하여 다양한 방법으로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을 마침내 마음의 귀를 열고 들을 수 있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심령이 그 들려진 하나님의 말씀과 그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살아난 영혼이 되었다고 하는 것을 나타낸다. 영혼이 죽어 있다고 하면 몸의 기능을 통하여 하나님의 부르시는 말씀을 듣는다 하여도 그 부름에 합당한 영적 반응을 보일 수 없다.

여기서 중생, 혹은 거듭남을 이해하기 위하여 몇 가지 짚고 넘어 갈 표현들이 있다. 첫째는 예수를 믿고 구원 받기 전 사람들의 영혼은 죽어 있다라고 하는 표현이다. 영혼이 죽어 있다고 하는 말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아담의 범죄로 모든 사람들이 허물과 죄로 인하여 그 영혼이 죽은 상태로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그들이 한 인격체로서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영혼의 기능이 말살된 것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 태어나기 때문에 그 속사람의 기능인 지, 정, 의 속에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을 뿐만 아니라, 그런 기능들조차도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갖는 것조차 싫어하여,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고, 대적하는 쪽으로 작용하고, 결과적으로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에 관한한 역기능적 역할을 하는 상태에 있다는 것을 뜻한다. 이 역기능적인 역할 때문에 예수를 믿기 이전 사람들은 설령 신적 존재를 인정하고 신을 찾는 시도를 한다하여도 그들의 생각이 허탄해 지는 것이고, 결과적으로는 자기 중심적인 우상을 만들어 숭배하게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8-32절, 에베소서 2장 1절-3절, 4장 17절-20절).

영혼이 중생했다고 하는 것은 마음에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생각하기조차 싫어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던 그 영혼의 역기능적 기능들이, 복음을 통하여 불가항력적으로 역사하시는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하고 하나님 생각하기를 즐거워하며 하나님께 순종하며 살아야 마땅하다고 생각하고, 느끼고, 의지하는 순기능적 기능들로 변화된 것을 뜻한다. 중생했다고 하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사람의 영혼의 기능들이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를 따라 영적으로 하나님과 살아 있는 인격적인 관계 속으로 들어 가기를 즐겨 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둘째로, 중생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도, 들어 갈 수도 없다고 말씀하셨다 (요한복음 3장 5절-8절). 중생, 거듭남, 위로부터의 영적 출생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는 결과이다. 사람이 성령으로 난 사람임을 알 수 있게 되는 것은 자신이 성령으로 거듭난 그 시점에 대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자신의 영혼에 일어난 지, 정, 의의 변화와 그로 인하여 파생되는 언어와 행동, 거기에 수반되는 자신의 삶의 변화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은 이 일에 대하여 니고데모에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은 다 이러하니라”고 말씀 하셨다. 이 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 들은 사람이 마음으로 하나님이 계신 것을 믿고, 그 하나님을 즐거워하며, 그 하나님과의 관계를 사모하여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 싶은 열정이 생겼다고 하면, 중생의 싯점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이 바람 소리를 듣고 바람이 있음을 알듯이, 자신의 내면 속에 일어난 변화를 보면서 자신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거듭난 사람임을 확인 할 수 있다는 말이된다.

셋째로 중생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역사이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죽은 영혼을 살릴 수 있는 능력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곳에 영혼이 살아나는 역사는 없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없이도 영혼이 살아나는 구원의 역사가 있을 수 있다고 하면, 전도나 선교라고 하는 말은 무의미해 진다. 이 세상 민족과 나라들 가운데서 그 어느 누구도 기록으로 주신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이 없이,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속이나, 성령의 역사를 말할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영적 거듭남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 것임을 반증한다.

넷째로 중생은 성령의 은혜로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일 때만 이해 될 수 있는 영적 실제이다. 중생의 내용을 가장 잘 묘사하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로마서 6장 2절 이하, 골로새서 2장 11절 이하의 몇 절 말씀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말씀들은 믿는 사람들이 세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장사되었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한 바 되었고, 예수님이 부활했을 때 함께 일으키심을 받아 새생명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 된 것이라고 한다. 중생은 예수님과의 이 영적 연합으로 말미암아 믿는 사람들의 영혼에 나타나게 된 새로운 생명이다. 이것 때문에 성경은 예수를 믿고 거듭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을 새로운 피조물이라고 부른다 (고린도후서 5장 17절). 이런 말씀의 내용들은 몸의 오관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성령의 감동을 따라 영혼 깊이 받아들이고 믿어야만 하는 것들이다.

정리하면, 중생은 전적인 성령의 역사로 말미암아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 새 생명을 뜻한다. 이 생명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믿는 사람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생명이다. 그러므로 이 중생은 믿는 자 쪽에서 오관을 통하여 중생의 순간을 경험하려고 시도 할 수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성령의 내적 역사로 말미암아 이미 영혼 속에 일어난 변화, 또 그 변화로 말미암아 파생적으로 나타난 말과 행동과 삶의 변화를 통하여 확인 할 수 있는 영적 실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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