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사람들은 맹수들이 서로 싸우면 누가 이길까에 대해 궁금해 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사자와 호랑이가 싸우면 누가 이길지에 대한 궁금중입니다. 정답은 자연 세계 속에서 맹수들은 서로 싸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싸워서 다치면 승부를 떠나 결국 자기 손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호랑이와 곰이 서로 맞붙은 희귀한 영상이 신문에 게재된 적이 있었습니다. 곰은 끝까지 싸우려고 하였고, 호랑이가 물러서면서 싸움은 마무리되었습니다. 얼핏보면 곰의 승리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결국 둘 다의 승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곰이 끝까지 싸우려고 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습니다. 곰에게는 새끼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곰에게는 절대로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반면에 호랑이는 물러섰기에 오히려 다치지 않고 생명의 위험을 초래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건강한 호랑이는 언제든 먹잇감을 다시 구할 수 있습니다.

곰과 호랑이의 한판 대결을 보면서 중국 한나라의 한신이 강을 등지고 진을 쳐서 조나라의 군사를 물리친 사건에서 유래한 “배수진”과 손자병법의 36번째 전술법인 상대방이 훨씬 강할 때는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는 “주위상”이 떠올랐습니다. 배수진은 어떤 일을 성취하기 위해 더이상 물러 설 수 없음을 비유적으로 이른 말입니다. 반면에 주위상은 어리석게 싸우다 많은 것을 잃지 말고 훗날을 기약하며 지금은 자존심을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한다는 미래 지향적인 전술법입니다.

인생에는 물러서야 할 때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가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중요한 지혜는 물러설 때와 물러서지 말아야 할 때를 구분할 줄 아는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언제가 그 때일까요? 호랑이와 곰의 한판승부가 그 실마리를 제공합니다.

곰은 자기의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 물러서지 않습니다. 생명을 위한 일에는 물러섬이 없어야 합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일에는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복음은 논리와 신학의 문제를 넘어서 본질적으로 생명의 문제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도 배수진을 치고 생명을 구원하기 위해 끝내 십자가를 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뒤를 따라 기독교는 순교자를 배출하며 생명을 나누기 위해 그 어떤 위협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복음의 문제에 있어선 결코 물러서지 말아야 합니다.

호랑이는 먹잇감의 문제이기에 물러섭니다. 먹고 먹히는 관계는 결국 주도권의 문제입니다. 힘과 권력과 명예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는 물러 설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나라간의 분쟁을 보아도, 정치를 보아도, 가정에서도, 그리고 교회에서도 우리는 주도권의 문제 앞에서 주위상의 전략을 지혜롭게 구사하지 못하고 오히려 배수진을 치는 안타까운 모습을 보곤 합니다.

물러서야 할 것과 물러서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지 못하기에“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 고통 두려움 뿐 그 지겨움 끝없네”라는 복음송이 있는 것 같습니다.

곰과 호랑이. 사실 그들이 맹수이긴 하지만 그들은 인간에 비하면 미물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인간보다 훨씬 더 지혜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며 겸손해야 하는 우리들의 당위성을 찾게 됩니다.

복음에서 멀어져가는 세계 그리고 심지어 교단과 교회를 보며 복음을 위해서는 물러서지 않겠다는 순교자의 신앙을 가지면서도, 동시에 나를 높이는 주도권의 문제 앞에서는 겸손할 수 있는 종의 신앙을 가질 수 있게 되기를 소망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