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에 딸 아이가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조르기에 한 아이스크림 전문점을 들른 적이 있었습니다. 어리석은 질문이지만, 어떤 답변이 나올까 재미있을 것 같아서 딸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근데 내가 왜 여기에 서영이를 데리고 와서 아이스크림을 사주지?”딸 아이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오히려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제게 이렇게 답변하였습니다.“아빠 딸이니까 그렇지. 당연하거 아냐?”너무 당당한 딸아이의 답변에 제가 오히려 순간 기가 죽어서 저도 모르게 혼자 중얼거렸습니다.“그렇지. 딸이니까 당연하지.”

아빠/엄마에게 당당할 수 있는 자녀. 생각할수록 재미있었던 것은 그 답변을 들었을 때 오히려 제 기분이 좋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날 따라 딸 아이의 손을 잡고 가게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사주는데 얼마나 행복했는지 모릅니다. 사실 지금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그렇게 당당하게 말해준 딸 아이가 더 예쁘게 느껴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딸아이가 “나는 아빠의 딸이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하는 게 아빠인 저에겐 행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도 하나님께“저는 하나님의 아들/딸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말할 때 하나님께서는 행복하시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하나님께서 얼마나 자신있게 우리를 향해 말씀하셨는지 모릅니다.“너를 조성하신 자가 이제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사43:1) 하나님은 기쁨으로 우리가 당신의 자녀라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 아버지께 우리도 주저하지 않고 당당하게“제가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라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나님께서 행복해 하시지 않을까요?

부모와 자녀의 관계는 사실 당연한 관계입니다. 부모는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반면에 자녀는 부모의 말씀에 순종하고 따르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문제는 이 당연한 관계가 깨질 때 일어납니다. 당연한 관계가 깨지면 불행해 집니다. 행복은 오히려 당당한 데 있습니다. 아빠와 엄마는 자신있게 내가 너의 아빠/엄마임을 말할 수 있는게 행복입니다. 자녀도 내가 아빠/엄마의 자녀라고 당당하게 느낄 수 있어야 행복합니다. 자신있게 부모는 자녀를 훈육하고, 자녀는 부모에게 당당하게 필요한 것을 요청할 수 있어야 행복합니다.

물론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 된 우리의 관계는 육신의 부모와 자녀의 관계와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육신은 한계가 있고 피폐해지는데 있습니다. 육신의 부모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약해집니다. 그렇기에 젊었을 땐 부모가 자녀의 필요를 채워주는 게 당연한 것이지만 부모가 늙고 약해졌을 땐 자녀가 부모를 돌볼 수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시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 다시 말해 처음과 끝이 되십니다. “내 아버지 집”에는 모든 것이 풍족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풍요로움은 영원합니다. 아버지 하나님께서는 자녀인 우리가 당당하게 요청하길 원하십니다.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느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요 16:24)

당당했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라는 확신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자녀라는 확신가지고 당당하게 요청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자녀로서 꼭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자녀로서 우리가 하나님께 당당하게 요구하듯이,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로서 당연히 우리를 훈육하며 율법을 준수하라고 명하실 수 있슴을 기억하면 좋겠습니다. 아버지 하나님과 자녀인 우리의 행복한 관계는 당당한 가운데 필요한 것을 요청하고 동시에 하나님의 말씀은 당연히 순종하는 데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