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어릴 때였습니다. 아마 열살 무렵이었던 같습니다.아버지께서 녹음기 한대를 사오셨습니다. 그 무렵만해도 녹음기는 그리 흔하지 않은 시기였습니다. 정말 신기했습니다. 그 기기에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담고 다시 들어보았을 때 느겼던 멍한 기분은 지금도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녹음기로부터 흘러나온 식구들의 목소리는 늘 듣던 그 소리가 맞았지만, 유독 나의 목소리만큼은 내 것 같지 않았습니다. 마치 처음보는 사람을 대하는냥 그저 낯설기만 했습니다. 녹음기를 산 기념으로 온 식구들이 각자 한곡씩 노래를 불러 녹음을 했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노래를 참 잘한다고 생각을 했었는데, 정작 들어본 저의 노래는 스스로 느끼기에도 아니다 싶었습니다. 아마도 그때부터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하는 것이 무척이나 두려워진 일이 된 듯합니다.

시간이 흘러서 목회자가 된 후 첫 대중 설교를 했었습니다. 회중들의 반응은 그런대로 괜찮은 것 같았습니다. 은혜받았다. 감동받았다. 참 좋았다... 등등 설교 후 이런 저런 격려가 많았습니다. 혼자서 쾌재를 불렀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설교를 얼마나 준비했었는데.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얼마나 열심히 공부했었는데. 내 설교에 감동이 없다면 말도 안되지. 그런데 저의 이런 착각은 얼마가지 못했습니다. 내 설교가 담겨진 테이프를 다시 듣는 순간 얼굴이 빨개지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말은 알아듣기 어려울 정도로 빨랐고 발음은 왜 그리 부정확했던지. 몇날 며칠을 두고 준비했던 원고화된 설교와 40분 정도 구두화된 설교는 너무도 느낌이 달랐습니다. 나의 설교를 들으면서 스스로 얼굴이 화끈거릴 뿐이었습니다.

이 후 처음으로 영상처리된 저의 설교를 모니터링했던 순간 또한 결코 잊을 수 없습니다. 목소리로 접하던 모니터링에서 어느 정도 익숙해 질 무렵 접했던 적나라한 나의 설교 모습. 설교 중 드러나는 각종 제스처와 표정은 그저 어설프다는 느낌으로 전해올 뿐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보기에 민망하다는 것이 그때의 느낌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일 것입니다.

이런 느낌은 비단 저만의 느낌이 아닐 것입니다. 녹음기나 녹화기를 통해서 보이는 스스로의 모습이 그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물론 자주 접하다 보면 익숙해 지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왜 이런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일까요? ‘객관화’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행동은 관찰이 됩니다. 그러나 자신 스스로의 말이나 행동은 관찰이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만들어 놓은 말과 행동에 대해서는 ‘추측성 관찰’을 할 뿐입니다. 그러다 보니 ‘주관적 평가’가 만들어질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주관적 평가가 때로는 착각을 하도록 부추기도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 착각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래서 스스로를 늘 모니터링 해야 합니다. 스스로를 모니터링 하는 방법이 바로 QT라고 알려진 경건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가 표현한 말과 행동을 다시 재생시켜 보여주는 녹음기나 영상기가 될 수 있습니다.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자신이 만들었던 말과 행동을 다시 살펴보노라면 자신에 대한 ‘객관화’가 이루어집니다. 이 객관화를 통해서 인생 최대의 적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착각’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마귀는 착각을 교묘히 이용합니다. 착각을 통해서 실수를 저지도록 만들며, 인생사 잘못된 결정을 하도록 유도합니다.

성공하는 인생들의 공통된 점 중 하나는 자신을 늘 모니터링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착각이라는 늪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성공자가 될 수 밖에 없습니다. 스스로를 모니터링 할 수 있는 최고의 기기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입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을 작동시켜야 합니다. QT라는 경건의 시간을 통해서 성경을 작동시켜 자신의 모습을 모니터링 할 때 비로소 성공의 길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시편 119: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