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마터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뻔 한 바울을 북돋우어 준 은인, 바나바와 크게 싸우고 선교팀이 두 개로 갈라지게 하는 원인을 제공한 것은 미숙한 상태의 마가였다. 1차 선교 여행에서 고된 선교여행의 장도를 눈 앞에 두고, 밤빌리아에서 젊은 마가는 부담스럽고, 힘겹게 느껴지는 선교팀에서 무단 탈퇴를 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민 교회의 청년들을 바라볼 때 마가와 같은 심정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청년들이 적지아니할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규모가 크지 않는 교회에서 청년들은 그 존재 자체만으로서 신선함을 가져다 주고, 젊기 때문에 봉사를 환영하는 부서도 많다. 교육부에서는 교사로, 찬양대와 찬양팀에서 서로 데려다가 일군으로 사용하기를 기대하는 것이다. 대형교회에서도 청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항상 쓸모있는 일군의 역할을 해 주기를 바라는 그런 대상이었다. 그런데, 1세이든, 1.5세이든, 이민자이든 유학생이든, 젊은 날에 얼마나 할 일도 많고, 부담도 많은가? 오랫동안 청년 사역을 하면서 지켜 본 바로는 이민생활에 자급 자족, 자기 생활을 지탱하느라고 삶에 지친 청년들도 수 없이 많이 볼 수 있었다.

교회 나오는 이유가 물론 신앙 때문이겠지만, 친구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그 영혼과 마음에 안식을 누리기 원하는 것이 우선순위일 때가 많은 것은 결코 이기주의가 아니요, 지친 영혼의 자연스러운 욕구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하지만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교회생활을 자기 만족만을 위해서 추구할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니겠는가?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셨는데, 십자가의 길을 눈 앞에 두고서, 의무감에, 부담감에 힘들어 하고, 특히 목회자나 중직자의 자녀들이 강요 당하다시피 그 십자가의 길을 가다가는 도중에 도망가 버리고 마는 일들이 생겨나는 것이다.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이라면 희생의 대가를 치르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정답이다. 성숙한 성도들일수록 무거운 짐도 달게 지고, 오히려 영광으로 여기는 날도 찾아오게 될 것이며, 그것을 신앙성장의 목표로 삼는 것이 옳은 것임을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자기 자신의 어깨 위에 놓인 삶의 무게도 감당하기 힘든 형편에, 어찌 교회 공동체에서 부과되는 여러 사명들까지 모두 웃는 얼굴로, 오랫동안 감당할 수 있겠는가?

목회자로서의 고민과 기도의 제목이 여기에 있다. 어떻게 하면 청년들에게 행복하고, 영적인 재충전이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기회를 계속 제공하는 동시에, 또한 청년들이 성숙한 주님의 제자가 되어서 교회에서 맡겨주시는 십자가를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강한 용사들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목회자들과 장년 성도들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각 교회의 청년들, 1.5세, 2세들을 보석과 같이 귀하게 여겨 주시라는 부탁이다. 내리사랑의 원리는 통하는 바이기에, 청년들이 교회에 받은 사랑은 절대 잊지 않는다. 관심과 사랑을 주고, 식사도 대접하고, 장학금도 주고, 청년사역을 담당할 목회자, 예산, 예배 장소, 저들만의 위치가 교회 안에서 확고하게 담보되는 것을 말은 하지 않아도 갈망하며 기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청년들에게 충분히, 피부에 닿을 만큼의 사랑이 쏟아 부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어야 한다. 그리고 저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먼저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가는 교회의 일군 됨을 보여줄 때에, 때가 이르면, 사도 바울이 마가에 대하여 재평가하면서 남긴 말처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딤후 4:11)

성숙한 마가의 유익함을 마음껏 칭찬하게 되는 날이 오게 되리라고 믿는다. 교회 역사상 마가는 바울의 동역자들, 예수님의 제자들 못지 않는 뚜렷한 유익함의 열매를 남긴 인물이다. 마가복음을 기록하여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생애와 사역을 생생히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준 복음서 기록자가 바로 그 마가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이민교회의 젊은 마가들에게 용기와 소망을 가지도록 격려하며, 교회를 섬기는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전진하는 모든 청년들에게 칭찬과 박수를 마음껏 보내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