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적 명절만 되면 신나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명절에 받은 돈으로 장난감 총을 사서 동네 친구들끼리 총싸움 하던 일이다. 부모님이 장난감을 사줄 만한 여유가 없으셨기 때문에 나는 이 싸움에 거의 끼지 못하곤 했지만, 옆에서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있고 신이 났었다. 어쩌다 남이 쓰던 고장난 장난감이라도 하나 얻은 날이면 무척 설레면서 이 총싸움을 하면서 놀 것을 기대하곤 했었다. 어린 마음이었지만 평소에 늘 갖고 싶었던 장난감이 하나 있었다. 허리에 지갑을 차서 꽂아 넣을 수 있는 권총 장난감이었다.

TV에서 본 서부 개척 영화 속의 주인공이 가지고 다니던 그런 총을 가져보고 싶어했다. 그래서인지 어느 해는 벼르고 별러서 부모님에게 갖은 수단을 동원해 용돈을 타, 이것을 모아 가지고 명절 때 보란 듯이 평소에 그리던 꿈의 권총을 지갑과 함께 샀다. 권총을 허리에 차고 동네 어귀로 나오니 영락없이 동네 친구들이 자신들의 장난감 총을 가지고 열심히 총싸움 놀이를 하고 있었다. 나도 이제는 당당하게 친구들 틈에 끼여 놀이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 놀이에 들어가 보니 모두들 장난감 총이 아니라 멋진 장총(Rifle) 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첨단 음향시설까지 달린(지금의 장난감에 비하면 형편없는 수준이었지만) 총을 가지고 노는 것이 아닌가? 이 장난감을 얻기 위해 많은 시간 부모님을 졸랐던 노력이 헛수고가 되는 순간이었다. 이 때가 내 인생에 처음으로 돈에 대하여 주눅드는 순간이었던 것 같다. 이 일로 인해서 어린 마음이었지만 돈이 주는 편리함과 여유에 대해서 알기 시작했던 것 같다.

돈은 사람을 편하게 만들지만 그런 편리함은 돈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에게는 아쉬움으로만 남는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돈 앞에 주눅들고 열등감을 느끼는가 보다. 돈에 대한 주눅과 열등감은 곧 소유욕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러나 돈에 대한 집착과 소유욕이 강하면 강할수록 물질에 대한 열등감은 더욱 더 깊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 시대는 돈에 대한 열등감은 많은데, 말씀대로 사는 삶에 대한 열등감은 적은 것 같다. 진리를 선포하는 당당함, 정의 앞에 바로 서고자 하는 의연함보다는 타협과 비굴함으로 우리의 실리를 채우려고 할 때가 많다. 다니엘은 포로로 잡혀간 이국 땅에서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때에 왕 앞에 당당하였다. 유난히 많은 왕을 평생동안 섬겼던 그에게 계속해서 왕에게 조언을 하는 자리와 나라를 다스리는 자의 위치에 서게 하였던 힘은 자신을 총애하던 왕뿐만 아니라 자신을 무시하는 왕에게조차 하나님의 말씀을 직언할 수 있는 당당함이었다. 왕이 물질과 권세를 제시하며 자기들의 꿈을 해석하라고 하였을 때, 그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서슴지 않고 선포하였다. 물질과 권세가 결국 하나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을 그는 삶 속에서 깊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당당함이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아닌가? 물질 때문에 명예 때문에 혹은 세상의 사람들이 정해놓은 그 기준들 때문에 나의 삶을 세상과 타협하면서까지 하나님께 바쳐야 될 시간과 인생을 소비할 수는 없다. 진리를 선포하고 하나님의 공의를 드러낼 수만 있다면 조금 손해는 볼지라도 나를 속이지 않는다. 조금 느리게 가더라도 불의의 방법을 선택하지는 않는다. 내가 붙든 진리가 진짜임을 확신한다면 중국의 공안의 삼엄한 눈초리 속에서 복음을 전할 수 있고, 북한의 시퍼런 총 칼 앞에서도 신음하는 동포들을 껴안고 저들의 눈물을 닦아 줄 수 있다. 이것이 진리의 편에 서서 그 진리를 소개하고 선포하는 당당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