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8년 12월 7일, 수습된 시신만 2만 5천구가 넘는 엄청난 재앙을 일으킨 대지진이 아르메니아를 강타했을 때의 실화입니다. 대지진으로 건물이 무너져 내려 스물 여섯 살의 수잔나 페트로시안과 네 살 된 딸 가야니가 건물 벽 더미 속에 갇혔습니다. 모녀를 기다리는 것은 오직 깊은 어두움과 죽음의 공포 뿐. 아이는 갈증과 굶주림에 지쳐 울부짖었습니다.

그때 수잔나는 유리조각으로 자신의 손가락을 찔러 딸에게 그 피를 먹였습니다. 딸을 품에 안고 두려움을 이기게 한 어머니는 딸이 보챌 때마다 차례차례 손가락을 베어 아기의 입에 물렸습니다. 이들 모녀는 매몰된 지 14일 만에 극적으로 구출됐는데 어머니 수잔나의 손가락 열개는 모두 피범벅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희생은 자기 생명도 포기하였음을 의미하는 일인데, 사랑이 아니고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우리가 눈을 들어 살펴보면 온 땅에, 온 세상에, 아니 온 우주에 사랑이 넘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하나님 만드신 세상 어느 것 하나 사랑 아닌 것이 없습니다. 여름 내내 나무를 위해 수고하던 나뭇잎은 가을이 오면 어김없이 낙엽이 되어 떨어져 썩어짐으로 나무의 거름이 되어줍니다. 봄이 되면 꽃들이 사랑의 웃음을 터뜨리고, 새들이 사랑을 노래합니다. 하늘의 별들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고 태양은 만물을 살리기 위해 사랑으로 자신을 불태우고, 달은 사랑으로 밤하늘의 가로등이 되어 줍니다. 실로 온 우주가 사랑으로 충만합니다.

그렇지만 피조물의 사랑이 아무리 위대하고 감동적일지언정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한계를 지닌 유한한 사랑일 수밖에 없습니다. 피조물의 사랑은 한결같지 않습니다. 많은 경우 인간의 사랑은 자기중심적이어서 결국 자기 이기심의 지배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품속의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부모가 없지만 그러나 바로 그 부모의 잘못된 이기적인 사랑으로 인해 깊이 절망하고 크나큰 아픔을 안고 살아가는 자식이 의외로 많이 있습니다.

또 피조물의 사랑은 진실하지도 않습니다. 자식에게 정직하라고 훈계하면서도 정작 부모는 정직하게 살지 못합니다.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라고 말은 하면서도, 자식이 친구와 싸워 이기고 오면 속으로 좋아합니다. 독재자들이 자기의 자식들에게 정권을 물려주려는 잘못된 사랑으로 많은 사람들이 고통을 당합니다. 결국 이 땅의 부정과 부패의 고리가 끊어지지 않는 것은 진실성을 결여한 그릇된 사랑, 잘못된 사랑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피조물의 사랑은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죽어가는 자식의 병상에서 속수무책으로 눈물짓고 있는 부모들이 세계 도처에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러나 여기에 한결같은 사랑이 있습니다. 어떤 경우에도 거짓으로 치우침이 없는 진실된 사랑입니다. 그 위에 더하여 영원한 생명까지 책임져 주는 사랑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독생자를 죽이시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은 ‘이-만-큼’ 우리를 사랑한다고 양 팔을 벌리고 우리를 향해 다가오십니다.

우리가 세상의 어두움에 있지 않고 진리의 빛으로 나아올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으로 인함입니다. 미움과 이기심의 포로였던 우리가 용서와 관용의 사람으로 변해 가는 것도 십자가의 사랑 때문입니다. 욕심과 거짓과 불의의 옛사람에서 벗어나 비록 서툴긴 하지만 한 걸음씩 영생을 바라보며 헌신과 희생의 삶으로 나아갈 수 있는 것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구원을 얻고 변화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하나님의 사랑을 바라보며 살아가도록, 기도하며 쓰임 받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