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딸아이가 아빠 머리에 흰머리가 보인다며 뽑겠다고 난리였습니다. 끝내 못 뽑게 했습니다. 이유는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이 제겐 매우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어려서부터 저는 남달리 넓은 이마를 타고 났습니다. 아버지의 핏줄을 그대로 이어받은 것입니다. 다행히 아직은 아버지의 머리처럼 되지는 않았지만, 언젠가 그 미래가 닥칠 것이기에 하루라도 더 오래 버텨보고자 한 것입니다. 또 언젠가는 어차피 백발이 될텐데 흰머리 몇 가닥이 난들 뭐가 대수랴 하는 마음이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뽑고 싶어하던 딸아이도 아빠의 비애를 이해하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며칠 전에 심방을 가는데, 아내가 옆자리에서 거울을 보며 흰머리를 뽑고 있었습니다. 세월 앞에 장사없다고, 20살에 처음 만난 제 아내도 이제 흰머리가 날 시간이 되었나 봅니다. 아내가 흰머리를 뽑는 것을 보자, 제 오른쪽 옆머리에 그동안 오래 자리잡고 있었던 그 흰머리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무심결에 “나도 흰머리 있는데” 한마디 했더니, 아내가 눈을 반짝거리며 뽑아 주겠다고 성화였습니다. 한참을 반항하다가, 운전 중인지라 어쩔 수 없이 아내에게 지고 말았습니다. 대신 단호하게 한마디 했습니다. “흰머리만 뽑아야돼! 다른 머리 절대 뽑지마!” 아내는 신이 난 눈망울로 저를 쳐다보며 “절대 걱정말라”고 자신감을 피력한뒤 제 흰머리에 손을 댔습니다.

“뽑았다” 하는 아내 말에 슬쩍 손가락을 쳐다보았더니 이게 웬일입니까, 흰머리 한가닥, 검은 머리 한가닥, 두 가닥이 뽑혀 있는 것입니다. 미안해 하는게 당연할것 같은데, 씩씩거리는 저를 보면서도 아내는 재밌다고 깔깔거립니다. 속으로 얼마나 얄미웠나 모릅니다.

그렇게 한참을 웃는 아내를 보다가, “와! 이거 알곡과 가라지 비유랑 똑같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태복음 13장을 보면 한 농부가 주인을 찾아와 추수 때가 되가는데 가라지가 보인다며 염려하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농부는 알곡을 보호하기 위해 주인을 찾아와 가라지를 뽑겠다고 보고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농부에게 그렇게 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냥 함께 자라게 놔두라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가라지를 뽑다가 가라지와 함께 알곡도 뽑으면 어떻게 하겠느냐고 주인이 염려했던 것입니다.

언젠가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목회를 하는데, 저 사람만 없으면 목회할 만 하겠다 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저 사람이 없는게, 자신에게 뿐만 아니라 다른 성도들에게도 훨씬 나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 이 알곡과 가라지의 비유를 기억나게 하셨다고 합니다. 괜히 한 사람을 나쁘게 여겨 뽑아내려고 하다가 다른 알곡도 상처를 입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구관이 명관이라고, 어차피 그 사람을 뽑아내면 그 악역의 자리를 반드시 다른 사람이 더 크게 채워 왔다는 경험을 되새겼다고 합니다.

이 땅에서의 삶은 어차피 완전한게 아닙니다. 원죄 이후, 우리 인간의 본성은 죄를 짓는데 얼마나 빠른지 모릅니다. 그래서 우리의 인간관계도 항상 변화 무쌍합니다. 그렇기에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는 말이 있는 것 같습니다. 삶을 살면서 사람에게 상처를 입을 때, 우리는 그 사람만 안 보면 편해질거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뽑아내면 해결될 거라는 생각, 아니면 차라리 나 자신을 뽑아내면 될 거라는 생각, 이 모든 것은 사단의 유혹일 뿐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안고가라. 그리고 추수때까지 기다려라.”

흰머리 한가닥을 뽑으려다가 소중한 검은 머리가지 뽑혀서 씩씩거리는 저에게 아내가 나름 변명을 합니다. "머리카락이 너무 쉽게 뽑히네. 뿌리가 이렇게 약하면 안되는데. . . " 뿌리를 더 강하게 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주변의 상황이나 다른 사람에게 눈을 돌릴게 아니라, 오히려 나의 반석이신 예수님께 더 단단히, 더 깊이 뿌리를 내려야 할 것입니다. 결국은 너의 문제가 아니라 나의 문제입니다. 너와 나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문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