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하얗게 그것도 소복이 쌓인 들녘 길을 걸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저는 지난 주간 하얀 눈이 쌓인 길을 오랜만에 걸었습니다. 얼마 전 내린 눈이 그동안 계속 추운 날씨로 인해 녹지 않고 그대로 대지를 덮고 있던 지난 화요일에 침묵 수양회를 하기 위해 간 침묵수양관(Day Spring Retreat Center)이 온통 하얗게 눈으로 덮여 있은 덕분에 참으로 오랜만에 눈길을 오랫동안 걸었습니다.

침묵수양관은 우리 교회에서 차로 30여분정도 밖에 소요되지 않는 그리 멀지 않은 도심지 주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일단 수양관에 들어서기만 하면 도심지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어느 한적한 시골과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한적하면서도 아름다운 곳입니다. 수양관 전체 면적이 250여 에이커니까 약 30만평이 넘는 꽤 넓은 규모 때문이기도 하지만 수양관을 찾을 때마다 언제든지 자연 속에 둘러싸인 듯 한 아늑함과 포근함, 그리고 자연의 싱그러움과 신선함을 맛보게 해주는 곳입니다.

우리 교회에서 영성훈련의 일환으로 침묵수양회를 시작한 것이 지난 해 초부터니까 벌써 만 1년을 지나면서 그동안 10여 차례의 수양회를 같은 수양관에서 가져왔지만 봄, 여름 가을, 겨울 각 계절마다 자연을 통한 하나님의 은총을 다르게 경험하기에 수양관을 갈적마다 왔던 곳을 다시 온다는 느낌보다는 언제든지 새로운 은총을 경험해오고 있습니다. 봄날의 꽃향기, 여름 잎새의 푸르름, 가을 낙엽의 정취, 그리고 겨울이 주는 고요함, 이와 같은 계절마다의 색다른 은총으로 하루를 보내는 마음 또한 사뭇 다르군 합니다.

이렇게 계절이 주는 다양한 아름다움을 경험해왔지만 눈이 쌓인 수양관에서 하루를 지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눈을 무척이나 좋아해서 눈이 내리면 마냥 기분이 좋아지고, 어디론가 훌쩍 가고 싶고, 한없이 눈길을 걷고 싶어 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눈이 소복이 쌓인 수양관 들길을 걸으면서 생각해보니 그렇게 눈 쌓인 길을 걷기를 좋아하면서도 정작 그렇게 걸어본 것은 그리 많지 않았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날은 침묵을 시작한 아침부터 점심때까지 계속 눈길을 걸었습니다. 그냥 눈 덮인 들녘 길을 걷는다는 것만으로도 너무 좋아서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눈길을 걸은 것은 아마도 그동안 살면서 그렇게 눈을 좋아하고, 눈이 온 길을 걷기를 좋아하면서도 실제로는 별로 걷지 못했다는데 대한 아쉬움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눈이 온 수양관 오솔길은 사실 침묵수양회를 올적마다 늘 걷던 길인데도 눈이 덮인 그 길은 제게 새로운 길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같은 길이고, 여러 번 걷던 길인데도 길 위에 눈이 덮이고 그리고 덮인 눈 위로 아무도 지나가지 않아 아무 자국도 없이 하얀 눈만 맑게 쌓인 길을 걸어보니 마치 이 세상에 창조된 이후 아무도 걷지 않은 새 땅을 처음으로 걷는다는 새로움이 주는 설레는 감격이 저로 하여금 그날 눈길을 계속해서 걷게 한 듯합니다.

하루의 침묵 일정을 마치면서 참가하신 분들과 하루를 침묵하며 자연 속에서 지내며 가졌던 느낌들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는데, 같은 눈길이었지만 각기 다른 느낌을 경험했었습니다. 눈이 쌓인 길을 걷노라니 어렸을 적이 기억나고, 이제 살아서 몇 번이나 더 눈길을 걸을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면서 이렇게 살아서 눈길을 걸을 수 있다는 것이 큰 은총이라고 고백하는 이가 계신가 하면, 연세가 지극한 어르신께서는 나무숲사이로 난 하얀 눈길을 걸으면서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이 모두 죽은 듯 서있는데 그 가운데로 난 하얀 눈길은 마치 결혼식장에 신부를 맞이하기 위하여 깔아놓은 하얀 카펫같이 보이며, 당신이 주님 앞에 갈 때에 당신을 맞이하기 위하여 그런 하얀 카펫 길이 준비되었으면 좋겠는 마음이 드셨답니다.

또 다른 분은 눈길을 걷다보니 하얀 눈이 주변 사방의 웬만한 가지들을 모두 덮여 있는데 유독 하늘을 향해 곧게 선 가지들은 그 눈에 덮이지 않은 것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모든 허물을 은총으로 덮어 주시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우리 자신을 숙이지 않고 곧게 서면 그 하나님의 은혜에 덮일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그날, 눈길을 걸으면서 오랫동안 다녀서 익숙한 같은 길이지만 눈으로 덮인 후 눈 위로 아무런 자국도 없는 하얀 눈길을 걷자니 마치 그 길이 생기고나서 처음으로 걷는 듯 한 느낌이 들었는데 우리네 삶도 비록 하루하루가 크게 다르지 않고 매일 오가는 길처럼 익숙하지만 그 삶이 하나님의 은총으로 덮이게 되면 같은 자리, 같은 시간이라도 지금까지 한번도 살아보지 않은 시간을 사는 감격이 있고, 아직 누구도 가보지 않은 새 길을 밟는 흥분이 우리의 삶속에서도 느껴지게 된다는 생각을 하면서 우리네 삶의 길에도 주님의 은총이 하얗게 덮이기를 기도했습니다.

/글 이승우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