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은사 땅밟기’ 동영상이 문제가 된 건 어쩌면 그들이 ‘밟은’ 땅이 봉은사였기 때문이 아닐까. ‘땅밟기’는 실제로 많은 크리스천들이 선교지나 교회 건축 예정지, 그리고 ‘영적 전쟁’이라는 이름으로 주요 거점 등에서 일부 성도들이 행하고 있는 신앙적 운동 중 하나다.

그런 ‘땅밟기’에 대한 논란이 공중파 뉴스 프로그램에서도 방영되는 등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절에서 기도를 했다는 사실만으로 기독교인들은 땅밟기가 무엇인지도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아프간 사태에 이어 다시 한 번 공격적·배타적이라는 비난에 휩싸인 것이다. 이제는 기독교 내부에서 땅을 밟는 행위가 성경적으로 무엇을 뜻하고, 이같은 행위가 정당한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살필 필요가 있다.

선교학의 명저 <미션 퍼스펙티브> 공저자인 스티브 호돈(Steve Hawthorne)은 <그리스도인의 땅밟기 기도(예수전도단)>라는 책에서 단순한 땅밟기가 아닌 ‘땅밟기 기도’가 무엇인지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중동 한 도시에서 개척 연구를 하다 땅밟기 기도를 시작한 스티브 호돈은 고향인 텍사스주 오스틴에서 땅밟기 기도를 한 경험이 있고, 땅밟기 기도자들을 세우고 가르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고 한다.

이 책은 ‘현대 예배음악의 아버지’로 불리는 그래함 켄드릭(Graham Kendrick)이 함께 썼다. 그래함 켄드릭은 ‘비추소서’, ‘온 땅과 만민들아’, ‘세상 권세 멸하시려’ 등 온누리교회 경배와찬양을 통해 초창기에 소개된 많은 곡들을 작곡했다. 그는 지난 1987년 영국 런던에서 땅밟기 기도와 함께 시작된 ‘예수 행진(March for Jesus)’의 공동 설립자이자 장거리 땅밟기 기도의 비전을 품고 1989-1990년 영국을 북에서 남으로, 서에서 동으로 가로지르는 국토 행진에 참가했다.

땅밟기 기도는 ‘현장에서 통찰하는 기도’

책에 의하면 땅밟기 기도는 최근 많은 도시에서 봇물 터지듯 일어나는 중보기도를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새로운 단어’다. 땅밟기가 아닌, ‘기도’에 방점이 찍힌다. 간단히 말하면 이는 ‘현장에서 통찰하는 기도’이자, 지역을 공략하는 것이 아닌, ‘섬기는’ 행위다.

통찰하며 기도하는 방법은 관찰과 연구, 계시 등 세 가지다. 평범한 관찰력은 기도의 초점을 조율하는 통찰을 낳고, 선택한 지역의 역사를 미리 조사하면 중요한 거점을 발견하거나 강력하게 기도할 수 있으며, 하나님은 분별력과 같은 영적 은사를 주셔서 잘 몰라서 기도할 수 없는 부분의 비밀을 밝혀주신다.

걸음과 기도의 종류는 다양하지만, 이를 좀더 풀어보면 자신의 긴급한 문제보다 이웃과 가정, 만나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는 ‘중보 기도’다. 자투리 시간이나 걸을 일이 생기면 하는 기도가 아닌, 일부러 의식적으로 시간을 내어 걸으며 해야 한다. 응답을 바라는 바로 그 장소에서 기도하며, 가끔은 걷다가도 특별한 장소나 높은 곳에서 일부러 걸음을 멈춘다.

땅을 밟으면 지역 사회의 실상에 민감해지고, 아는 것이 많을수록 더 효과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 규칙적으로 도시의 거리를 지나다니면 이웃과 쉽게 만날 수 있고, 꼭 필요한 시기에, 적절한 장소에서 새로운 친구를 돕거나 그를 위해 기도할 기회가 생긴다.

땅밟기 기도를 통해 그리스도인들은 이웃과 자연스럽게 만나 진심으로 섬기면서 반감을 없앤다. 또 도시와 자신이 동떨어져 있다며 두려워하기 쉬운 그리스도인들에게 도시의 우범지대까지 품을 수 있게 만들고, 소극적·수비적 태도가 아닌 땅을 딛고 악에 맞서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는 태도를 지니게 한다. 그러면서 기도생활이 향상된다.

땅밟기 기도는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전도와 교회 개척 등 하나님 나라를 위한 여러 활동을 낳게 된다. 특히 더 힘차게 자신이 사는 곳을 섬기고 복음을 전하기 바라지만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때, 하나님께서 당신에게 주신 지역에서 땅밟기 기도를 시작하면 말 그대로 ‘한 걸음씩’ 성장할 수 있다.

땅밟기의 목적, 그리고 성경의 땅밟기 기도

땅밟기 기도는 그저 하나님의 관심을 끌기 위한 수단이 아닐까? 하나님은 거실에서든 예배당에서든 어디서나 기도를 들으시는데 굳이 거리를 다니면서 기도하는 이유와 실제로 기도할 때 일어나는 일에 대해 호돈은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땅밟기 기도는 중보기도자들이 합심해서 기도할 때 무슨 수학 공식처럼 능력이 작동하는 것이 아닌 상황에서 ‘하나됨’을 이루도록 중보기도를 돕는다. 또 순수한 믿음으로 집중할 수 있도록 하고, 기도제목이 구체적이고 성령의 인도를 많이 받을 수 있게 한다. 땅밟기 기도를 가장 효과적으로 할 수 있는 동력으로는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악에 맞서 ‘전쟁’하는 것, 그리고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리스도의 나라를 ‘영접’하는 것 등 세 가지다. 영접에 있어, 땅밟기 기도자는 지역 사회를 축복하고 상처받은 사람들을 찾아가 하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이는 분위기로 만든다.

땅밟기 기도의 ‘선구자’는 구약의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약속의 땅을 처음으로 걸었던 사람이다. 그 걸음을 시작으로 그는 모든 현장에서, 새로운 이웃들 앞에서 잇달아 기도하고 공공연하게 예배했다. 그는 소돔성을 바라보며 ‘의인 10명’을 놓고 하나님과 논쟁하면서 처음으로 도시를 품고 기도한 인물이다. 호돈은 “성경에서 아브라함이 현장에서 기도한 사실을 길게 기록한 것은 우리도 땅밟기 기도를 하라는 명령”이라며 “아브라함을 통해 우리는 비전을 품고 친구를 사귀며, 예배를 공개하고 섬길 준비를 하며, 도시를 위해 자비를 베풀어달라고 기도했음을 배울 수 있다”고 설명한다.

가장 유명한 땅밟기 기도 장면은 여호수아다. 그는 출애굽 이후 갈렙과 함께 40일간 가나안 땅에서 정탐기도에 나섰고, 지도자가 된 후에는 그 유명한 ‘여리고성 전투’를 앞두고도 이같은 정탐을 보낸 다음 실제 전투에서도 민족 전체와 함께 하루에 한 번씩 땅을 ‘밟아’ 성을 무너뜨렸다.

민수기 13-14장에서 처음 12명의 지도자들은 가나안 땅과 그 민족을 전략적으로 파악하는 ‘연구 통찰’을 맡았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그 땅의 죄악보다는 악을 주의깊게 분별하면서도 하나님의 비전과 미래의 열매들을 바라보았다. 과장이 아닌 유익하고 안정된 보고와 철저하고 겸손하게 하나님을 따르지 않으면, 땅밟기 기도는 10명의 정탐꾼처럼 변질될 수 있다.

가장 극적이고도 상징적인 ‘땅밟기’가 나타나는 여리고성 전투를 보자. 여호수아는 잇달아 ‘별난 행동’을 하라는 지시를 받았는데, 이러한 ‘예언적 행동’은 마술이 아닌 자연스러운 기도였다. 여기서 모든 걸음이 기도임을 알 수 있지만, 걷는 것 자체에 능력이 있다고 오해해서는 안 된다. 걸음에 집중하다 보면 하나님과 대화할 수 없다.

여리고성 전투는 초자연적인 힘이 나타났고 그 지역 전체 방어력을 뒤흔든 결정적 전투였으며 하나님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이를 기록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도시를 위해 싸울 때 부주의한 행동을 하게 되고, 비유적으로 읽으면 때때로 영적 싸움을 선인과 악인의 대결로 오해할 수 있다. 하나님은 여리고성과 같은 ‘검증된’ 방법으로 다른 도시를 공격한 일이 한 번도 없다. 이미 끝난 전투를 재활용하지 않으신다는 얘기다.

땅을 차지하는 건 ‘온유한 자’… 하나님의 적이라도 모욕할 필요 없어

그러므로 땅밟기 기도자들은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자신의 영을 잘 분별해야 한다. 예를 들어 홍등가에서 기도할 때는 미묘한 반격을 받을 수 있으므로 그리스도만이 주실 수 있는 정결함이 필요하다. 우리의 임무는 그 당시처럼 우상의 파괴가 아닌 우상 숭배자를 바꾸는 일이다. 바울처럼 그들을 하나님께 돌아서게 하면, 그들은 스스로 우상을 태우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다.

최근 논란 가운데 있는 여러 ‘극단적인’ 행동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다. 교전하면 반격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적을 모욕하는 말은 때때로 허울뿐인 교만을 낳는다. 땅을 차지하는 건, ‘온유한 자’다.

주장도 명확해야 한다. 호돈은 “우리의 것이라 주장해서는 안 된다”고 분명히 이야기한다. 사회에서 지도적 위치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새겨 들어야 할 말이다. “이 고등학교는 우리의 것입니다”가 아니라, “주 예수님을 위해 이 고등학교를 취합니다. 여기 학생들과 이곳은 주님의 것입니다”라 기도해야 한다.

싸움만 해서는 안 되고, 결실을 거둬야 한다. 우리의 싸움에는 다양한 면이 있고 땅밟기 기도는 그 일면에 불과하므로, 이를 계획할 때 악이 단번에 뿌리뽑힐 거라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은 악이 사라진 자리에 영적인 결실이 열리는 것을 기뻐하신다.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그들에게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 도시를 취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