많은 이들이 한국교회의 위기를 말한다. 정체 혹은 후퇴하고 있는 성장세, 자꾸만 들려오는 부정적 소식들, 교회에 대한 사회의 불신 팽배 등 총체적 난국은 미래 한국교회의 전망을 어둡게 한다. 그러나 한국교회 구석구석에서 여전히 저마다의 영성과 철학으로 ‘희망’을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본지는 특별히 목회 현장 가운데에서 한국교회에 희망을 전하는 리더십 50인을 만나 그들의 사역을 소개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비전을 제시하고자 한다.

교회에 들어서고 화장실부터 찾았다. 긴장을 좀 풀기 위해. 그런데 입구에 놓인 흰색 수건이 눈길을 끈다. 화장실 바닥에, 그것도 흰색 수건을…, 신을 닦으라는 배려였지만, 그래도 흰색이라니. 그만큼 깨끗하다는 자신감인가. 어쨌든 기분은 좋았다. 화장실은 청결했고, 무엇보다 좋은 향기가 났다. 그러고 보니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정돈된 느낌이랄까. 마치 잘 가꿔진 정원처럼, 교회엔 누군가의 세심함이 배어 있었다.

“당회장실이 어딥니까?”
“4층으로 올라가세요. 아, 계단보다는 승강기를 이용하는 편이 나을거에요. 오른쪽으로 돌아가면 있습니다.”

1층 로비에서 처음 마주친 여 집사님의 미소는 밝았다. 친절했던 그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있다. 한국교회의 위기? 글쎄…, 경기도 일산 충정교회에서 옥성석 목사를 만났던 1시간 남짓, 기자는 교회가…, 한국의 교회가 좋았다.

그 옛날 사랑의교회를 떠나면서…


▲옥성석 목사와 처음 만났을 때 그의 목소리는 약했다. 조금 지쳐 보이기도 했다. 많은 업무를 처리하던 중이었다. 하지만 이야기가 시작되자 그는 금세 밝아졌다. 가끔이지만 목에 힘줄이 서기도 했다. 믿음을 그 무엇보다 강조하는, 믿음의 목회자처럼. ⓒ김진영 기자

옥성석 목사를 어떻게 소개하면 좋을까. 쉬운 방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는 고(故) 옥한흠 목사, 사랑의교회를 개척했고 제자훈련이라는 양육 시스템으로 한국교회에 큰 족적을 남긴 유명 목사의 사촌 동생이니까.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알고 있다.

그런데, 이 때문에 그를 더 소개하기 힘들다고 하면 이해할 수 있을지. 옥한흠이라는, 제자훈련이라는 그 수많은 수식어들이 그의 진짜 모습을 오히려 가리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다. 물론 그는 그의 사촌 형인 옥한흠 목사를 누구보다 사랑한다. 사촌 동생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가까이 지켜볼 수 있었던 지난날이 그 어떤 것보다 감사하다. 그럼에도…,

“사랑의교회 부교역자로 있다 지금의 충정교회로 부임하고 사랑의교회를 떠나면서 지나왔던 잠수교…. 만감이 교차했습니다. 스스로 몇 가지 다짐을 했어요. 사랑의교회 성도들에겐 전화를 하지 말아야겠다는 것, 되도록이면 이 한강을 다시 건너지 말아야겠다는 것, 그리고 옥한흠 목사님의 도움을 구하지 않겠다는 것이었죠.”

왜 그랬을까. 사랑의교회, 옥한흠 목사라는 이름에 가려질 자신이 싫어서였을까. 아니다. 결코 홀로 뭔가 해보겠다는 그런 객기가 아니었다. 누구보다 자신의 약함을 절감했던 그였는데…, 그는 하나님 앞에 홀로 서고 싶었다. 사랑의교회를 떠나 마치 광야와 같은 교회로 떠나던 날의 그 두려움, 옥 목사는 그 두려움과 함께 시작될 자신의 미래를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하나님께만 의지하고 싶었다.

충정교회로 부임하다

옥성석 목사가 처음 서울 서대문에 있던 충정교회에서 설교하던 날, 교회는 그야말로 처참했다. 오랜 갈등으로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그 여파로 교회 건물은 제대로 관리되고 있지 않았다. 주변 사람들이 왜 이 교회로의 부임을 그토록 만류했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다. 자꾸만 마음이 쓰인다. 옥 목사는 그 때, 목자의 마음 같은 것을 느꼈다고 했다.

부임을 결정했다. 1989년, 그의 나이 36세 때. 열정이 넘쳤다. 넘어진 이 교회를 다시 하나님 앞에 당당하게 일으켜 보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의 차가움은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도시 공동화 현상에, 젊은이들의 교회 이탈 현상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졌다. 무엇보다 오랜 교회 갈등으로 지역사회에서의 교회 이미지는 추락할 데로 추락해 있었다.

암담했다. 부임 후 무려 10년 가까이 젊음과 열정을 쏟았으나 기대했던 열매는 맺히지 않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어보였다. 밑바닥까지 떨어진 기분…. 왜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극적인지, 때론 가혹하리만큼 아픈 현실 속에서, 눈물의 기도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을 때, 그제야 인간의 손을 잡으시는 하나님. 그러나 누가 말했던가. 그 때까지 가서야 비로소 하나님의 손을 우리가 잡는 것이라고. 언제나 우리를 향해 먼저 내밀고 계셨던 그 손을.

‘믿음’을 깨닫다


▲자신이 깨달은 믿음을 말할 때, 그는 사뭇 진지했다. 많은 고생과 고통, 기도 가운데서 얻게된 깨달음이었으리라 ⓒ김진영 기자
옥 목사도 그 때 하나님의 손을 잡았다.

“강대상에서 밤을 지새우던 어느 날 ‘믿음이 작은 자들아’라는 음성이 마치 확성기의 소리처럼 제 귓전을 때렸어요. 믿음, 믿음, 믿음. 그래, 내 믿음이 작았구나. 나름대로 믿음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믿음이 정말 초라했다는 걸 깨달았죠.”

옥 목사는 이후 신약 마태복음에서 시작해 요한계시록까지 ‘믿음’이란 단어가 어디에 어떻게 등장하고, 어떤 용도와 의미로 쓰였는지를 확인하기 시작했다. 그런 과정에서 그 믿음이라는 단어가 명사형에서 동사형으로, 그리고 서신서에선 충성이라는 의미로 쓰이고 있다는 것도 발견했다.

“주님이 원하시는 건 단순히 입술로 고백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었어요. 믿는 바를 행동으로 옮기는 것, 그게 곧 진정한 믿음임을 알게 된 거죠. 더 나아가 믿는 바를 행동에 옮기되 ‘충성스럽게’ 실천하는 것이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그냥 바라만 보는 것이 아니다. 이런 유의 믿음에는 역사가 나타나지 않는다. 기적은, 하나님의 역사는 행동하는 믿음, 사용하는 믿음에서 나타난다.’ 어둡기만 하던 눈앞에 조금씩 빛이 보였습니다.”

역시 변화는 한 사람, 리더에게서 시작한다는 말은 틀리지 않았다. 옥 목사가 변하니 교인들이, 교회가 따라서 변했다. 그 옛날 사도의 말처럼, 깨달은 한 마디로 전한 설교는 그대로 교인들의 가슴에 가 박혔고, 새 힘을 얻은 교인들은 교회를 돌보기 시작했다.

일산으로의 이전…부흥을 맞다

결국 충정교회는 교회 이전이라는 터닝 포인트를 맞는다. 조금씩 변화하던 교회는 일산으로의 교회 이전을 기점으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했고, 이후 눈부신 부흥을 거듭해 지금에 이르렀다. 이 모든 게 믿음, 성경에 수없이 등장하는 그 한 단어를 깨닫는 것에서 비롯됐다. 옥 목사는 그런 자신의 깨달음과,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담아 ‘믿음 사용 설명서’(국제제자훈련원)라는 책을 최근 펴냈다.

“사실 성경에 등장하는 믿음의 사람들은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이 특별히 성경에 기록되고 지금까지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주는 건, 그들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이죠. 어려운 상황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고 끝까지 그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쓰고 싶었어요. 나도 믿으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는 걸, 평범한 나도 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습니다.”

잠시 엉뚱한 생각을 했다. 믿음을 이야기 하고 그 믿음의 힘을 말하는 목사, “예수 믿는 믿음만이 우리를 이기게 한다”는 옥 목사…, 그의 사촌 형이었던 옥한흠 목사가 ‘사랑의교회’를 목회했으니 그가 목회하는 교회 이름은 ‘믿음의교회’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옥성석 목사는

고신대학교 신학과(B.A.)와 총신대학교 신학대학원(M.Div)를 거쳐 미국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박사(D.Min) 학위를 취득했다. 숙명여자대학교 객원교수, 기독신문 논설위원을 지냈고 현재 총신대학교 운영이사, 교회갱신협의회 공동회장, 미래목회포럼 공동이사장, 기독교TV 고양 본부장 등을 역임하고 있다. 저서로는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은 사람, 야곱」 「어처구니를 붙잡은 삼손」 「은혜의 타작마당에 누운 룻」(이상 국제제자훈련원) 「행복 공감 가정예배서」(한국문서선교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