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서는 그 방법 밖에 없으셨을까? 왜 하필이면 십자가의 길을 택하였을까?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무엇이 부족하여 십자가의 방법을 선택하신단 말인가? 최악의 경우를 최선의 방법으로 해결하실 수 있지 않으신가?

헬라인들은 미련하다 하고 유대인들은 꺼려하는 그 십자가의 방법을 택하신 것일까?

십자가는 고통이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아픔의 자리이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은 아픔을 아시는 분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하나님께서 얼마나 아프셨을까? 아버지의 마음으로. 그렇게 하여 전능하시고 거룩하신 분께서 인간의 아픔을 아시는 분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의 또 다른 의미인 것이다.

죄의 결과이기는 하지만 인간은 모두 아픔이 있다. 다소의 차이는 있겠지만 아픔이 없이 사는 사람은 없다. 직접적인 병의 아픔을 안고 사는 분도 계시지만, 가난의 고통, 관계의 고통, 외로움의 고통,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고통도 있다. 아픔을 당하는 자의 고통도 있지만, 알게 모르게 아픔을 주는 자의 고통도 있다. 모두 아파하고 있다.

어떤 사람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 사람의 아픔을 알 때 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인생은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감싸주고 치유하며 사는 관계일 것이다. 겉으로 드러난 웃는 모습, 화려한 모습, 건강한 모습만을 보고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십자가를 택하신 것도 어쩌면 인간의 이 아픔의 자리를 찾으신 것이 아닐는지? 아픔을 통하여 우리와 더불어 살고자 하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시리라. 그래서인지 C. S. Lewis는 “고통의 지혜”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다. 고통의 자리는 깨닫는 자리요, 하나님을 만나는 지혜의 자리인 것이다.

이번에 ‘행복전도사’라는 분이 너무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두 내외가 모텔에서 자살을 하였단다.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그 길을 택하였을까?그분에게 붙여진 이름이 ‘행복전도사’였단다. 아마도 다른 사람에게 행복한 인생을 전하는 일을 하셨던 모양다. 어찌 인생이 행복해야만 하겠는가? 아프고 힘들면 그렇다고 말하지. 모두가 그렇게 살기에 서로가 서로를 보듬어 주었을 것을. 어쩌면 서로의 아픔을 나누면서 사는 것이 더 인간적이지 않았을까?

기독교가 기독교인 것은 십자가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인간의 아픔의 자리에 찾아오시는 주님이시기에 기독교는 십자가를 첨탑 위에 세우는 것이이라. 어두운 밤하늘을 밝히는 빛나는 십자가도 좋지만 아픔을 서로 이야기할 수 있는 기독교이었으면 한다. 하나님께서 예수의 십자가의 자리를 통하여 인간의 아픔의 자리에 동참하시고자 한 것처럼 말이다. 성공도 좋고 행복도 좋지만, 그렇지 못한 인생들도 있음을 기억하자. 그래서 십자가가 필요한 것이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