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데렐라 신드롬이란 말이 있다지요 ? 착하게 이쁘게 살면 멋진 왕자 만나서 행복하게 살게 된다는 말인 듯합니다. 지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말이지만 우리나라 말에도‘여자 팔자는 뒤웅박 팔자다’라고 해서 남편 잘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남편만 잘 만나야 하나요? 아내도 잘 만나야 합니다. 좋은 사람을 만나는, 만남의 축복은 축복 중에서 가장 귀한 축복입니다. 좋은 가족을 만나고, 좋은 친구를 만나고, 좋은 스승을 만나야 합니다. 좋은 교회를 만나고 좋은 목회자를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어떤 분이 신데렐라 신드롬이란 말에 어떤 분이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신데렐라가 아무 노력 없이 얼굴 예쁘고 착해서 인생 횡재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신데렐라’의 뜻이 ‘먼지투성이’입니다. 그야말로 ‘청소하는 사람’이란 의미와 같습니다. 신데렐라는 어려서부터 온 집안일이란 집안일은 혼자 다했습니다. 계모와 언니들의 시달림을 꿋꿋이 이겨냈습니다. 만약에 신데렐라가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식구들을 미워했다면, 아무리 멋진 옷과 호박마차에 유리구두를 신었다 한들, 왕자의 마음을 끌 수 없었다는 겁니다.

사람의 마음은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잖아요. ‘얼굴’의 뜻이 ‘얼꼴’에서 나왔습니다. 그 사람의 정신(spirit)의 상태가 얼굴입니다. 미움이 가득한 사람의 얼굴을 아시지요? 분노가 가득한 사람의 얼굴을 우리가 압니다. ‘나 건드려만 봐라. 가만 안 있겠다’는 마음이 그대로 얼굴에 드러납니다. 그런 분들은 본인은 아무 생각 없이 가만히 있는다고 하는데도, 다른 사람이 볼 때는 영락없이 화난 얼굴입니다. 제가 아는 분 중에 정말 젊어서 탤런트처럼 잘생긴 남자분이 계셨습니다. 그 젊어서 사진을 보면, 지금으로 완전 ‘얼짱’입니다. 보통 미남이 아닙니다. 그런데, 가정에서 부인과 40년을 넘게 갈등하고 불화를 겪으면서 그 얼굴이 변하여서 지금은 광대뼈가 툭 튀어나오고, 눈썹 양쪽 끝이 위로 뻗쳐 있습니다. 잇몸은 다 드러나고, 이와 이사이가 다 벌어져서 도대체 젊어서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정말 얼굴은 ‘얼꼴’이 맞구나”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어려서부터 가족들의 학대를 받고도 신데렐라가 여전히 아름다움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신데렐라의 착한 성품과 어진 마음 때문입니다. 그 마음을 지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동화 신데렐라의 주제는 바로 이것입니다. 운이 좋아서 팔자를 고치고, 복권당첨된 것처럼 인생역전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어려움과 역경 속에서도 자신을 학대하는 가족을 미워하지 않는 성품, 자신의 인생을 지켜낸 결과가 바로 왕자와의 결혼이라는 보상으로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요셉도 같은 맥락에서 요셉이 제 아무리 꿈 해석이 능통하고, 능력 있다 해도, 보디 발 앞에서, 바로 왕 앞에서 분노에 가득한 범죄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면 총리가 가당키나 한 일이겠습니까 ?

하나님께서 요셉의 영혼을 미움과 분노로부터 지켜주셨습니다.

미움과 분노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영혼을 집어 삼키려는 원수 마귀로부터 우리의 영혼을 지켜야 합니다. 문제는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화가 나면 그냥 화를 분출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 것은 심각한 문제입니다. 미워하는 사람이 있으면, 사람들 앞에서 흉을 보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은 창피한 일입니다. 나와 소속이 다르다고, 생각이 다르다고, 나를 힘들게 한다고 미워하고 배척하는 것은 크리스챤의 바른 모습일 수 없습니다. 사랑할수록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할 수 없는 사람도 사랑하고, 미운 사람도 사랑하면 우리는 마침내 어느 순간 사랑의 사도가 되어 있을 겁니다. 반면에 미움도 부흥합니다. 미워할수록 미움은 더 커집니다. 처음에는 그저 맘에 안든 정도였는데, 계속 미움을 표현하고 생각하면 원수로까지 여겨지게 됩니다.

저를 서운하게 대했던 한 분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는 일에 대해서 못 마땅해 하고, 사람들 앞에서 면박을 주었습니다. 그 한 번의 일이 어찌나 서운했던지, 저는 친구들 모임이 있을 때마다 그분 험담을 일삼았습니다. 한 석 달 정도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하루는 제 아내가 집에 오더니, “한 번만 더 그분 험담하면 친구들 모임에 안 나갈거야.” 엄포를 놓는 겁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험담을 그쳤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분이 제게 어떤 말을 했는지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때 알았습니다. ‘미움은 키우면 정말 커지는구나.’ 미움은 무시해야 합니다. 표현하지 말아야 합니다. 계속 미움을 표현하면, 미움의 나무에 물을 주는 꼴이 됩니다.

그런 차원에서,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은 단순히 종교적인 격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크리스챤이라면 그러해야 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조건이나 자격이 아닙니다.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명령은 내 영혼을 지키는 일입니다. 원수를 미워하면 우리는 원수의 모습이 됩니다. 다윗이 사울을 미워했다면 그는 사울왕과 똑같은 사람이 되었을 겁니다. 사랑만 하기로 결심합시다. 그렇게 기도합시다. 우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주님께서는,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 ‘얼꼴’을 지키기를 원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