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연일 신문지상을 장식하고 있는 에디 롱 목사의 성추행 파문과 대조적으로 며칠 전 신문 지면 한 켠을 채우고 조용히 사라진 소식이 있다. 바로 조지아주 콜럼버스 지역 한 목회자의 안타까운 사망 소식이다.

부흥회에 참석하기 위해 플로리다 주로 향하던 론미카 D. 윌리엄스 목사와 교인들은 87년 형 낡은 밴의 뒷바퀴가 빠지는 사고로 고속도로에서 전복 돼 목회자를 포함, 4명이 사망하는 참사가 있었다. 고인이 된 목회자의 20년 지기 친구는 “작은 교회로서 큰 차를 장만하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며 친구가 처했을 경제적 어려움을 예시했다. 이 목회자의 사연은 35만 불 짜리 차를 끌며 20 에이커의 사택을 소유한 롱 목사와 극명한 대비를 이루며 보는 이들의 마음을 씁쓸케 했다.

어떤 이는 놀랄 만큼의 부를 누리고 있고, 동시에 어떤 이는 죽음을 각오해야 할 만큼의 가난을 경험하고 있는 현실이다.

비슷한 이야기가 성경에도 기록돼 있다. 자색 옷과 고운 베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하던 한 부자와 대문 앞에 버려진 채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으려 했던 거지 나사로(눅 16:19)의 이야기. 기독교인이라면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익숙한 이야기이지만, 여전히 우리 사회 속에 심지어 교회 안에서 조차 부자는 부자로, 나사로는 나사로로 살아가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이는 비단 물질의 부요함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얼마 전 애틀랜타 한인교계를 각성케 했던 한 비극적 사건을 기억한다. 4월 한 50대 한인여성이 3천불이 넘는 병원비와 악화되는 건강, 생활고를 비관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한 때 지역 한인 교회의 교인이었던 그녀는 사건 당시 교회를 다니지 않고 있었으며, 사망 후 장례를 치러줄 지인이 없어 한인회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다. 어쩌면 지금도 우리 주변에는 그녀가 겪어야 했을 물질적, 영적 곤핍을 겪으며, 쓴 침을 삼키는 이웃이 있을 지 모른다.

치유는 전인적으로 이뤄져야 하고, 돕는 일 조차 전인적 도움이 되어야 한다. 이 일은 교회만이 감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사신 교회, 그 값진 사랑의 외침의 사명을 감당해야 할 교회가 침묵으로 소외된 이웃 돌보기를 외면할 때, 교회는 돌이킬 수 없는 형벌을 면치 못한 부자의 자리에 놓여야 할 지도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