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리의 법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동물의 세계를 보면 새는 새 떼끼리, 물고기 떼끼리, 개는 개끼리, 고양이는 고양이끼리, 쥐는 쥐끼리 모여서 삽니다. 나무가 많은 산을 가보아도 같은 종류의 나무끼리 자라고 있는 것을 쉽게 보게 됩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끼리, 단풍나무는 단풍나무끼리, 좌쉬아 나무는 좌쉬아 나무끼리 모여 있습니다. 인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한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고, 백인들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고, 멕시칸들, 흑인들이 많이 모여 사는 동네가 있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무리의 법칙입니다.

한 개인의 삶과 그의 운명도 이와 같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내가 찬양을 좋아하면 그런 사람들과 쉽게 어울리게 되고, 바둑을 생각하면 자연스럽게 바둑 두는 사람들끼리 어울리게 됩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들은 자기 내면 속에 가지고 있는 자화상을 따라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하기 때문에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그 자화상을 따라 무리가 형성되고 환경이 조성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자기의 운명과 환경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자기의 마음 판에 그려진 자화상을 바꿔야만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쁜 자화상을 가지고 좋은 삶을 기대하는 것은 가시나무에서 포도열매를 기대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자신은 죄인이라는 나쁜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죄를 지었다. 나는 나쁜 사람이다. 나는 별도리 없이 죄의 종노릇을 한다. 나는 의롭게 살 수 없다.’ 이런 자화상을 내면에 가진 사람들은 애를 써도 죄악 된 환경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끼리끼리 모이는 무리의 법칙에 따라 동류인 각종 죄가 함께 거하기 위해서 날마다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늘 자기가 병자라고 자랑 삼아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나는 병약하다. 폐가 나쁘다. 심장이 나쁘다. 위장이 나쁘다. 우리 집안에는 이런 병력이 있다. 난 이제 암에 걸릴 거야. 고혈압이 될거야. 혹시 당뇨는 아닐까?’ 이런 사람은 마음속에 자신을 언제나 병약한 자로 보고 있습니다. 늘 보약도 먹고 몸에 좋다는 것을 다 해보지만 자화상이 바뀌지 않는 한 또 아파오고 맙니다. 왜냐하면 자화상이 병을 불러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자기는 실패자요 가난뱅이로 보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실패자다. 나는 무엇을 해도 가난하다.’ 많은 남미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가난한 가난의식이 꽉 차 있습니다. 볼리비아는 구리 매장량 1위, 천연가스와 석유, 우거진 삼림과 각종 천연자원 등, 그런데도 나는 가난하다는 자화상이 있기 때문에 운명이 변하지를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는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자화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미워한다. 날 싫어한다. 날 사랑하지 않아. 난 버림을 받았어!’ 이런 자화상을 가진 사람들은 가는 곳마다 사람들과 싸우고, 아무 것도 아닌 일에 삐지고, 상처받고, 늘 가슴 아픈 삶을 삽니다. 그리고 꼭 무시되고 배신당하는 일들을 계속 체험하며 삽니다. 왜냐하면 끼리끼리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자화상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통해서 인간의 근원적인 문제, 죄와 사망, 가난과 저주와 질병의 문제가 해결 되었습니다. 이제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용서받은 의인이 되었습니다. 치료받은 건강한 사람이요, 성공자요 부요한 사람이며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과거의 삶을 십자가에 못 박고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앞을 바라보는 미래지향적인 사람이 된 것입니다. 성령님께서 은혜를 주셔서 우리 내면에 새로운 자화상을 갖게 하시는 것입니다. 새로운 자화상으로 변화된 참 그리스도인이 되시기를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