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이나 쫄딱 망했지만 재기했습니다. 그러나 성공을 위해서 남을 짓밟은 적은 없습니다.” 온갖 중상과 모략, 권모와 술수가 횡행하는 세상 속에서 네 번이나 망했으나 정정당당하게 재기한 교육전문기업[아이비김영]의 김영택회장은 입지적인 인물입니다. 2008년 매출 500억 원, 학원 수 전국36개, 대학 편입학 시장점유율 70%, 편입학 합격자 13만 명, 직원 수 213명이 1977년 서울 동대문에서 ‘편입학시장’이라는 블루오션을 개척한 이후 지금까지 대학 편입학 시장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해온 (주)아이비 김영의 현주소입니다.

<첫 번째 시련> 그는 네 번씩이나 처참하게 쫄딱 망했습니다. 첫 번째는 중3때 들이 닥친 아버지의 죽음이었습니다. 어머니조차 폐결핵으로 투병중이어서 아무도 학비를 대줄 수 없었습니다. 영택은 “유명한 경기고에 합격하면 누구라도 도와주겠지.”라고 생각하고 서울행을 단행했지만 입학시험1교시에 뛰쳐나오고 말았습니다. 고향에서는 공부를 잘하는 축에 들었으나 서울에서는 게임이 안됐습니다. 길을 가다 전봇대에 붙어있는 검정고시 광고를 보고 학원에 등록하여 다음해 경기공전 기계과에 전교3등으로 합격하게 됩니다. 열아홉 살 때부터 소설대여업에 이어 가게셔터수리업으로 조그만 성공을 합니다. 군복무를 마치고 다시 학원에 다니며 검정고시와 예비고사를 통과하여 1977년 고대 교육학과에 합격한 그는 ‘타임(Time)반’에 들어가 미친 듯이 공부하여 실력을 인정받게 됩니다. 편입학원에서 영어 강의 요청이 들어왔고 첫 번은 실패했으나 열정을 쏟은 결과 1978년 1월 기적이 일어납니다. 40명 수강생 중 34명이 고려대 편입시험에 합격한 것입니다. 합격자 발표를 보러 왔던 수많은 사람들이 ‘대학생 선생님’을 헹가래 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되면서 ‘학원 명강사’로 떠오르게 됩니다.

<두 번째 시련> 1978년 그는 동대문에 ‘김영편입학원’을 열었습니다. 김영학원은 히트를 치기 시작했습니다. 김영학원에 등록하려고 새벽부터 줄을 선 사진이 신문에 날 정도였습니다. 4년 동안 한달 평균 천만 원씩 벌었습니다. 당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가 천오백만원 할 때였습니다. 1980년 말 정부에서 졸업정원제를 발표했고 1981년 서울대 입시에서 사상 최초의 미달사태가 발생합니다. 문교부는 편입으로 미달인원을 충당하겠다고 발표합니다. 편입준비생이 밀어닥칠 것을 예상한 김영택은 가진 돈 전부를 투자해 확장했으나 문교부는 편입방침을 철회하고 모든 대학의 편입시험까지 금지시켰습니다. 한순간에 모든 재산이 날아갔습니다. 너무 실망한 그는 학원 계를 떠나 명성콘드 영업부에 들어가 잠시 성공하는가 싶더니 1983년 명성사건이 터지고 그는 또다시 길거리에 나앉게 됩니다. 그의 전 재산은 천원뿐이었습니다. 앉아서 굶을 수는 없어 일당만원짜리 우산수출회사에 취직합니다. 기발한 아이디어와 집중력과 추진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할 즈음에 자신 때문에 다른 직원이 해고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사표를 던지고 나옵니다. 또다시 실업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세 번째 시련>1987년 졸업정원제가 폐지되고 입학정원제가 부활했습니다. 대학편입시장이 다시 열릴 것을 확신한 그는 투자유치계획서를 만들어 투자자를 끌어들여 종로5가에 김영 대학편입정보센터를 차렸습니다. 첫해는 고려대의 편입방침 취소로 위기를 겪었습니다. 1988년부터 김영학원은 전성기를 맞게 되고 공채직원도 새로 뽑았습니다. 그러나 1989년 또다시 시련이 닥쳤습니다. 쫄딱 망해 길거리에 나앉았을 때 태어난 둘째아들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것입니다. 그는 다시 일어났습니다. 1990년 김영학원출신들이 전국대학 편입시험에서 560명이나 합격했습니다. 이후 18년간 사업은 승승장구였습니다. 1994년부터 1998년까지 이백억 원의 수익을 올렸습니다. 사업의 영역은 대학편입학원에서 10여개의 다양한 분야로 확대되었습니다. “내 인생은 끝없는 도전이었다. 도전의 역사이고 꿈의 역사다. 나는 후배들에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도전하라고 말한다. 도전을 못하는 것은 공산주의 사회에 사는 것과 같다.”

<네 번째 시련>제주도 출신으로 성공한 교육 사업가 김영택은 아이비 김영이 안정궤도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하여 자신이 뽑아 키운 전문경영인들에게 맡겼습니다. 대신 자신은 사회사업과 다른 분야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제주도 개발 프로젝트와 중국진출과 항만 사업 등에 관심을 갖고 활동하던 중 내부에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2008년도 매출이 500억 원이었는데 영업이익은 6%였습니다. 보통 영업이익이 30%수준인데, 알고 보니 직원들이 회사를 차지하려고 계획적으로 일을 꾸몄던 것입니다.” 직원들은 공짜나 지분을 30%나 줬음에도 불구하고 회사까지 차지하려고 사조직까지 운영했던 것입니다. 김영택은 2009년 7월 경영 일선에 복귀하여 수습을 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반드시 막힐 때가 있는데 그때는 초심으로 돌아가면 됩니다. 초심으로 돌아가 바닥에서부터 열심히 하면 또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는 일단 시작하면 미친 듯이 집중합니다. 무서운 집중력이 다시 일어나게 합니다. 그의 무서운 집중력은 4번이 아니라 40번 망해도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