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교회에만 유일하게 존재하는 새벽예배. 한국교회 부흥의 첫 번째 원동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개척교회부터 대형교회에 이르기까지 성도들의 신앙성숙과 더불어 부흥을 소망하는 곳에는 새벽예배의 열기가 더욱 뜨겁다. 이에 기독일보는 남가주 한인교회들의 새벽 설교를 집중 조명하여 새벽제단에서만 내리는 특별한 은혜를 나누고 개교회를 넘어 지역과 미주 전역의 부흥을 함께 소망하고자 한다.

전도서 3장 1절은 ‘천하에 범사가 기한이 있고 모든 목적이 이룰 때가 있나니’ 라고 했다. 나침반교회 민경엽 목사는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돌이키게 하기 위해 허락하신 때를 놓치지 말 것을 당부한다. 나아가 교회와 주님의 나라를 위해 헌신할 수 있는 때를 놓치지 말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마지막의 때가 오기 때문이다. 때문에 성도들의 기도가 더욱 간절한 나침반교회이다.

<본문: 예레미야 52장 1~11절>

의자왕 공민왕 고종 이들의 공통점이 무엇입니까? 각 나라의 마지막 왕이었습니다. 멸망하는 나라의 마지막 왕은 비극적입니다. 오늘 본문 시드기야도 가장 비극적인 왕입니다. 통치 마지막 1년 반 동안을 바벨론 군대로부터 포위를 당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 성 안은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너무 배가 고팠던 성문지기가 성문을 열어 주어서 바벨론은 진군하여 들어왔고 오늘 본문처럼 왕을 잡아서 심문하고 아들들을 죽이고 왕의 눈을 뽑아 죽을 때까지 옥에 가두었습니다. 왜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했습니까? 분명 이렇게 되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본문을 통해 두 가지 답을 알 수 있습니다. 2절을 보십시오. 시드기야가 여호야김 왕의 행위를 본받았다고 합니다. 여호야김 왕은 시드기야의 직전 왕은 아닙니다. 직전 왕은 8살 때 왕이 됐고 겨우 100일간 통치할 수 있었으며, 시드기야 왕의 조카였습니다. 이 왕은 시드기야에게 영향을 미칠만한 상황은 아니었습니다만 어린나이의 왕이었지만 그도 하나님 보시기에 악을 행했습니다.

그 악은 무엇입니까? 아버지의 악을 이어 받아 100일을 통치했다는 것입니다. 여호야김 왕은 시드기야의 형이다. 예레미야서 36장에 보면 어떤 사람인지 단적으로 나옵니다. 예레미야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말씀을 여호야김 왕 앞에 가서 말해주니 그 두루마리를 칼로 찢고 불에 태웠던 악독한 왕입니다. 역대상을 보면 여호야김 왕은 심술이 또한 가득했습니다. 이런 여호야김 왕의 악을 시드기야가 본받아 행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를 본받는가가 중요합니다. 나의 롤모델은 누구입니까? 교회 생활에서도 누구를 본받는가는 대단히 중요합니다. 좋은 모델을 찾아야 합니다. 저는 부족한 목회자이지만 하나님이 좋은 롤 모델들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개인적으로 중학생 때 주일학교 선생님, 고등학생 때 정용갑 목사님, 조현신 목사님 세분이 롤 모델입니다. 어떤 상황이 닥쳤을 때 ‘그분들이라면 어떻게 하실까...’라고 비추어 생각해봅니다.

내가 누구를 본받아야 할지 잘 생각해보십시오. 목사에게 좋은 점이 있다면 본받아야지...권사님에게 장점이 있다면 본받아야지..라는 마음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것 때문에 내가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본받을게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그 자신이 바른 시각으로 보지 못해서입니다. 교회에서도 줄을 잘 서야 합니다. 하나님 앞에 교만하고 이웃을 험담하며 업신여기는 사람들 뒤에 줄을 서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님을 본받는 자들입니다. 교회 안에는 좋은 분들이 많습니다. 단점을 보지 말고 장점을 보고 본받으려 해야 합니다. 그분들의 장점을 따라하고 흉내 내기를 부끄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렇게 내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드기야는 잘못 본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시드기야 왕이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 이유는 기회를 놓쳤기 때문입니다. 본문의 4~5절을 통해 보면 적어도 1년 반 정도를 바벨론으로부터 포위당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기간이 시드기야 왕에게는 회개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시드기야가 11년 통치했으니까 11년은 하나님이 주신 기회였습니다. 그 사이 한번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가는 사건이 있기도 했습니다. 역대하 36장 12~16절을 보면 이 기간 포로로 끌려갔던 시드기야에게 선지자는 간곡하게 당부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을 것을 말입니다. 예레미야 36장을 보면 감옥에 갇혀 죽을 위기에 처한 예레미야가 살려달라고 왕에게 요청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왕이 예레미야를 구해주면서 예레미야와 비밀회동을 갖습니다. 그리고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냐고 묻기도 했습니다. 바벨론에 항복하는 것이 살 길이라고 분명히 말해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예레미야는 다시 옥에 가둡니다. 대하 36:16 그 백성이 하나님의 사자를 비웃고 말씀을 멸시하며 그 선지자를 욕하여 여호와의 진노로 그 백성에게 미쳐서 만회할 수 없게 하였으므로

망해가는 나라였지만 시드기야가 포위당한 그 때에라도 회개했다면 유다가 망하지 않았을 수 있고, 어쩌면 이렇게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1년 반을 포위당했으니 성 안에는 기근이 일어나기에 충분하고 이렇게 굶어죽을 상황에 이르렀다면 돌이켜야 했습니다. 신약에 보면 탕자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유산을 모두 탕진하고 굶어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돌아가리라 마음먹게 됩니다. 아들이 아니라 종이라도 괜찮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시드기야는 뉘우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멸망의 길로 갔습니다.

에베소서 5:16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세월 속에 살고 있습니다. 이 세월을 어떻게 아낄지 또는 잃을 것인지는 우리 결정에 달렸습니다. 우리가 하는 영적인 훈련의 시간, 또한 우리에게 맡겨진 직분 모두 다 영원하지 않습니다. 장로 집사 권사 이런 것들은 사실은 제한돼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 해 직분을 감당할 기회를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이 시간을 아낄지 말지는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세월을 아끼라 라는 말은 지금 시간이 별로 없다는 말입니다. 나에게 무슨 기회가 있는지 생각해보십시오. 봉사 헌신하는 것 하고 싶어도 할 수 없을 때가옵니다. 시켜 달라고 해도 안 되는 때가 올 수 있습니다. 시드기야는 1년 반의 기회를 모두 다 놓쳤습니다. 하나님 앞에 기회를 건져 올려서 세월이 흐른 뒤 ‘그렇게 하길 정말 잘 했다’고 하는 고백이 넘치는 성도들이 되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