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싱턴한인목회연구원(원장 이병완 목사) 9월 정기모임이 7일(화) 여정크리스챤교회(담임 최윤환 목사)에서 열렸다.

이 날 “사데(Sardis) 이야기”를 주제로 세미나를 진행한 최윤환 목사는 BC 1200년경 리디아왕국의 수도로, 사도요한이 개척했던 동방 7교회중의 하나인 사데 교회가 위치했던 Sardis(사데) 지역에 대한 역사적 자료와 다양한 사진 자료들을 보여 주었다.

최 목사는 “회당의 건물 벽에 쓰였을 화강암 석판 중에 십자가가 새겨진 석판이 많다”며 “유대인들이 참소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후 초기 크리스찬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아 뿔뿔이 헤어져야 했던 역사적 사실을 기억할 때, 유대회당에 새겨진 십자가가 더 크게 다가왔으며, 당시 교회가 심한 박해 아래서도 줄기차게 서 있었음에 저들의 신앙열정을 눈으로 보는 듯 했다”고 전했다.

문의 : 301-538-3451(원장 이병완 목사)

최윤환 목사의 <사데(Sardis) 이야기> 원문

BC 1200경 당시 리디아왕국(터기 북서쪽 버가모 지역에서 수도를 두었다가, 동남쪽 아나톨리아까지 영역을 넓혔던 왕국)의 수도였던 Sardis는 신약시대에 들어와서는 사도요한이 개척했던 동방 7교회의 하나가 위치했던 곳입니다.

Sardis 동네에 들어서면서 곧바로 길가에 이오니아식인지, 실재는 도리아식으로, 웅장한 원주가 서 있는 유적에 휩싸입니다. 한 1,000명쯤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규모의 체육관 폐허와 유대회당이 있었다는 Synagogue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1958년에 발굴된 이들 유적은 3세기경 회당 옆으로 당시 체육관과 비잔틴 상가들이 들어서 있어, 시 중심가를 이루었던 것으로 확인되어, Rome 치하의 Sardis에서 유대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일찍이 전쟁포로로 끌려오거나 박해를 피하여 이스라엘에서 흩어져(Diaspora) 터키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들에 정착하였습니다.

이들은 당시 장사 수완뿐만 아니라 정치적 영향력도 축적하여 이곳 터키 당시 도시국가들이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갔을 때에는 로마의 시민권을 취즉하고 그들의 신 Jehovah를 섬기는 종교적 특권을 확보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들 유대인들은 구약의 모세오경(Torah)과 탈무드를 통해 문자도 해득하고 높은 지식과 생활의 지혜를 배웠고, 특히 자녀들에게는 반드시 생업을 꾸려 갈 수 있는 한 가지씩의 기술을 전수하는 것을 철저한 규범으로 지켜왔기 때문에 외국에 흩어져 살면서도 지식인으로 혹은 사업가로서 이들의 민족적 생존을 꾀할 수 있었지 않았나 싶습니다.

당연히 초기 기독교는 이들 유대인들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기독교가 유대인에 의하여 유대교의 토양에서 자라났다는 그 인과관계 때문에도 그러합니다.

더욱이 이스라엘 본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지독한 박해를 받았지만 이곳에서는 언어와 풍습이 같은 동족으로서, 또한 유대인들은 다른 이교도들과 달리 시민권을 소지하고 신앙의 자유가 허용된 특권적 지위에 있어, 이들 유대인 회중에게 비교적 자유롭게 선교활동을 펼 수 있었으리라는 점, 지중해 연안의 도시국가들에는 여러 종족과 종교가 혼거하여, Cosmopolitan적인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 이곳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의 유대인들보다 사고의 융통성이 있었으리라는 점에서 초기 크리스찬의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터키의 Tarsus(다소)에서 태어 난 사도바울이 지금의 터키 여러 지역을 다니면 전도여행에 나섰을 때, 자연신들을 우상으로 삼는 헬라인들이나 다른 이방인들을 주된 선교대상으로 삼았으며, 동족 유대인들로부터 많은 박해와 시련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기본적으로 이들 유대인들이 그의 선교 기반이 되었음은 성경 기록으로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의 전도여행으로 그의 제자가 된 신자들 중에 유대인들이 많았으며, 그러므로 전도여행 중 유대인 회당에서 강론도 하고 유대인 신자들 집에 머물 때도 많았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후 기독교 신자 중에 비 유대인 숫자가 많아지고 또한 유대교와의 차이가 부각되면서 이곳 로마의 지배자들은 이들 크리스찬들에 대한 박해를 차츰 가중하게 되었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크리스찬들은 로마제국 내의 다른 거민들과 마찬가지로, 과거와 현재의 로마 황제들은 태양신 Apollo의 화신인 ROMA라 하여, 이들을 경배하도록 강요당했습니다.

이렇게 박해가 가중되면서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고 혹은 배교행위를 하는 경우도 생겨나자, 사도요한은 동방의 7교회에 보내는 <주님의 말씀>을 전하기에 이릅니다.

요한계시록의 7교회에 대한 요한사도의 칭찬과 책망이 잘 나타나옵니다. 특히 <사데> 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앞에 네 행위의 온전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고 꾸짖으며 세상의 종말이 올 때에 주님을 충성되게 믿는 자는 영원한 구원을 얻을 것이요 악의 무리들은 영원한 벌을 받으리라고 설파하였습니다.

지금도 회당의 건물 벽에 쓰였을 화강암 석판 중에 십자가가 새겨진 석판이 적잖이 눈에 띱니다. 유대회당과 십자가가 아무 연관이 없다는 것은 분명한데 어떻게 해서 이곳 유대회당에 십자가가 있을 수 있는 것인가 깊은 사념에 잠기게 합니다.

유대인들이 참소하여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후 초기 크리스찬들이 유대인들로부터 여러가지 박해를 받아 예루살렘을 떠나 뿔뿔이 헤어져야 했던 것도 사실이고, 이곳 많은 유대인들이 개종하여 초기 크리스찬 공동체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나, 유대회당인 Synagogue에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십자가가 새겨있다는 것은 당시의 크리스찬에 대한 의미를 더해 줍니다.

아마도 오토만제국 이전에 이 지역을 지배했던 로마와 비잔틴제국 치하에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 하는 그 기구한 역사를 설명해 주는 하나의 예증이 아닐 수 없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오토만제국은 1299년, 셀주크왕국을 멸망시켰고, 1453년 콘스탄티노플 제국을 점령한 후 1923년 아라비아인, 아르메니아인의 국민혁명으로 그 막을 내립니다.

초기 로마제국 시대에는 유대인들이 시민권을 소지하고 그들의 신 여호와를 섬길 수 있는 특권을 누렸지만, 그들이 반대했던 크리스찬들은 가혹한 박해와 순교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특히 로마의 Domitian(AD 81-96) 황제가 제위에 올라 現神人이요 인격신에게 ROMA人 자신을 숭배하도록 강요하고, 종교탄압을 가하게 되면서, 크리스찬에 대한 박해는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저들이 이름 붙인 황금천(Golden Strem-사실 지금은 작은 개울물,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요한계시록에서 라오디기아 교회에 가한 이 책망에 대하여는, 실재로 라오디기아 지역과 Sardis가 그리 먼 지역이 아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서)을 따라 트물르스산 쪽으로 오르면 웅장한 규모의 알테미스 신전과 그 한구석에 그와는 아주 대조적인 작은 규모의 교회유적이 나옵니다. 이 교회가 동방의 7교회중의 하나인 사데 교회입니다.

신전 기둥은 높이만도 18m이고 한사람 반만큼의 손을 벌려야 겨우 맞닿을 정도의 굵기 기둥인데, 이러한 기둥이 78개나 늘어섰으니 대단한 규모가 아닐 수 없고, 지름길이가 어른 팔을 펴서 한사람 반의 팔 길이만한 치차형 원형 돌 앞에서는 눈이 휘둥그레집니다. 하지만 그래도 당시 기독교가 공인되기 이전, 지하교회 시대의 작은 교회규모였음을 미루어보아, 당시 교회가 그 박해 아래서도 줄기차게 서 있었음에 저들의 그 신앙열정을 눈으로 보는 듯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