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서 10장 24절은 교회 공동체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며.” 이 말씀처럼 교회의 특징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 또 있을까? 교회는 사랑과 선행의 공동체이다. 사랑과 선행의 사역을 감당하도록 계속해서 격려하는 곳이 교회이다. 그러나 우리의 교회 현실은 어떠한가? 사랑으로 격려하기보다는 서로 깎아 내리기에 바쁜 곳이다. 서로 돌아보기보다는 중상모략하고 시기하기에 바쁘다. 정죄와 비난이 난무한다. 교회에서 사랑의 격려를 받기보다는 상처받는 사람이 전화부에 등재한 사람보다 더 많은 현실이다.

왜 교회 공동체에 이러한 세속적인 모습이 빈번하게 나타나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교회 공동체에 대한 바른 인식이 결여된 탓이다. 교회가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공동체라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낮은 자의 발을 씻어 주는 섬김의 리더십을 가진 리더들을 찾기가 쉽지 않다. 목회자와 장로의 자리를 섬김 보다는 누리는 곳으로 착각하는 지도자들이 많기 때문이 아닐까?. 교회를 내 명예를 드러내고 내 위신을 세워 나가는 그런 세속적인 기관으로 착각하기 때문이 아닌지... 교회가 과연 그러한 곳일까? 교회는 지배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섬김의 정신을 내면화하는 곳이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세숫대야가 교회의 마땅한 정신이 되어야 한다.

원래 성령이란 단어는 보혜사, 우리를 돕는 자, 위로자로 번역하기도 한다. 성령이 하시는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사역이다. 성령님은 세상 끝날 까지 우리를 떠나지 아니하고 우리 곁에 서서 격려해 주신다.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로하신다. 흠이 많은 죄인들인 우리를 주님의 사랑 안에서 살아가도록 고무시키신다. 교회는 위로의 성령님, 격려의 성령님이 머무시기에 마땅한 격려의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오늘날과 같이 장기 경제 불황에 수많은 교인들이 눈물과 고통을 당하고 있다. 이럴 때 일수록 교회와 교인들은 사랑과 섬김의 화신이 되어야 한다.

목회를 하면서 두 종류의 교인들과 대면하게 된다. 첫째는 율법 주의적 자세를 가진 교인들이다. 그들은 엄격한 공의를 행사하며 늘 자신을 의롭다고 간주한다. 형제를 비판하며 심판하기를 좋아한다. 이 율법 주의적 교인들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고 침소봉대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짐을 무겁게 하고 그를 좌절시키고 위축시킨다. 일하고자 하는 사람의 의욕에 찬물을 끼얹는다.

둘째는 성령의 임재 가운데 사는 교인들이다. 그들은 고통과 좌절에 빠져 사는 사람을 일으켜 세워 주고 위로해 준다. 그들에게는 깊은 이해심이 있고 용서와 덮어 줌이 있다. 그들에게는 권면이 있고 기도와 격려의 포옹이 있다. 바나바와 같은 교인들이다. 우리의 인생 여정은 사막을 지나는 것과 같다. 어두운 터널을 지나는 것과 같다. 더구나 이민의 삶이란 불같은 광야의 길이다. 많은 사람들이 비틀거리며 자주 넘어진다. 이러한 때에 격려의 사람들은 쓰러진 교인들을 부축하고 업어 주며 다독여 같이 걸어간다. 그들의 사역으로 인해 우리들의 삶은 절망 가운데 소망을 품고 좌절 가운데 용기를 얻게 된다.

오늘날 이민 교회에는 격려의 사역자들이 훨씬 더 많아져야 한다. 정죄와 비판의 눈초리로 동료 교인들에게 상처와 시험을 주는 율법 주의적 교인이 아닌 사랑과 격려의 사역자들이 더 필요하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공동체로 부르신 것은 쓰러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서로 붙잡고 의지하며 격려하여 든든히 세워 주도록 하기 위함이다.

우리 인생의 남은 시간 동안 더 많은 사람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살아가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