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C.C의 창설자 빌 브라잍 박사는 “전도란 성령님을 의지하여 복음을 전하고 그 결과는 성령님께 맡기는 것”이라고 정의하였다. 그의 말대로 전 시대의 전도자들은 진정한 구령의 열심으로 개인전도를 힘썼던 것이다.

대 부흥사 디엘 무디는 사실은 부흥사 이기전에 개인 전도자로서 하루 한 영혼을 구원치 않으면 혓바닥에 바늘이 돋을 지경이었다. 한번은 너무도 바빠 개인 전도를 못하고 자리에 누우려는 순간 강한 성령의 도전을 받아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시카고 거리의 한 주정뱅이에게 복음을 전하고 예수를 영접케 하였다.

몇 년이 흘러 이 사실을 까마득히 잊어버린 무디에게 말쑥한 신사가 찾아와서 당신은 모년모일 한 밤중에 내게 복음을 전해 새생명을 얻게 하였고 나는 그 이후로 새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하였다. 그밤 무디가 성령님의 권고를 무시하였다면 이 귀한 한 생명의 탄생은 없었을 것이다.

한국 교회가 다시금 이런 구령전도에 눈을 뜨는 조짐들이 보여 반가운 일이다. 그러나 노파심에서 한마디 거들자면 전도를 교회 성장의 방편으로만 삼지 말자는 것이다. 만약 그렇게 되면 결국은 구령의 참된 정신이 희석되고 전도의 동기 부여나 전도의 방법이나 혹은 이를 위한 여러 가지 전도 간증들이 결국은 자 교회의 성장을 위해서 올인하는 모양세를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전도가 구령에 목적을 두지않고 성장에 목적을 두면 그렇지않아도 세속적 그리스도인을 양산하는 마당에 세불리기에 지나지 않아 빛과 소금된 참 그리스도인들을 기대할 수 없게 되는 까닭이다.

보수 교단들로부터 이단시 되는 모 집단은 처음부터 배척받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제자훈련에 몰두하여 전도를 등한시 하던 한국 교회 프로그램에 신선한 도전을 주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곧 전도를 자신들의 전매특허로 삼고 세불리기에 전력을 취하였다. 그 결과는 구령전도에 초점이 맞추어진 것이 아니라 기성교회 교인들과 심지어 교역자들을 공략하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에게 신학적 문제가 없지는 않지만 보다는 이런 전도전략 궤도수정이 이단시비에 말린 주 원인이 되었다. 이런 양상군자의 탈을 쓴 전도의 열심은 사실은 이들에게만 아니라 짧은 한국 교회사안에서도 되풀이 된 것이다.

소위 구원파라 하던 이들도 이런 맥락에서 다루어져야 할 것이고 지금은 교단화한 그들의 잔 뿌리들 역시 이런 잘못을 계속 범하고 있는 것이다. 교회는 참 그리스도인을 양성하기 위하여 전도와 양육이 균형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전도하니 수천명이 되었더라! 라는 식의 시나리오는 이제 그만 하면 좋겠다. 펜실바니아 애미쉬마을에서 정죄받은 한 청년이 과감하게 개인 전도를 위해 거리에 나온 다큐나 율법주의자들의 고향 이스라엘에서 생명을 걸고 복음을 전하는 메시야닉 크리스쳔들의 아름다운 영상을 떠 올리면서 워싱턴 D.C.에서 불특정 다수의 인종들에게 이 값없는 십자가의 복음이 전파 되는 꿈을 꿔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