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황제의 밀사
헐버트(Homer B. Hulbert)가 노래한 구한말의 대서사시

일본이 탈취해 간 고종 황제 내탕금의 전모를 최초로 밝힌다.

헐버트(Homer B. Hulbert)란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전문 역사가들마저도 헐버트의 참모습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 책은 조선의 개화 물결 속에서, 그리고 구한말 우리가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과정에서 역사의 한 축을 담당했던,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문명화의 선구자이자 독립운동가인 미국인 헐버트(1863-1949)의 일생을 다룬 일대기이자 역사서이며, 교양서이다.

헐버트는, 조선 정부가 최초로 설립한 서양식 교육 기관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교사가 되기 위해 1886년 7월 4일 조선 땅 제물포에 첫발을 내디딘 이래 20여 년 동안 한국에 살면서 교육자, 한글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선교사, 독립운동가로서 한국의 문명화와 주권 수호를 위해 크게 헌신하였다. 1907년 헤이그 만국평화회의 특사 파견사건 이후 일제의 박해로 미국으로 돌아간 헐버트는 미국에서 서재필, 이승만 등과 함께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하였다. 1949년 광복절을 기해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을 받고 한국에 환국한 지 일주일만인 1949년 8월 5일 청량리 위생병원에서 서거했다. 그는 생전에 《AP 통신》 기자에게 말한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라는 소원대로 현재 양화진 외국인 묘지에 묻혀 있다. 대한민국 정부는 헐버트 서거 다음 해인 1950년 3월 1일 그에게 건국공로훈장 태극장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1893년 감리교 선교사가 되면서 감리교 출판부인 삼문출판사를 책임 맡았다. 그는 동대문교회 담임목사를 지냈으며 노량진교회의 설립 예배를 인도하였다. 그는 아펜젤러, 언더우드를 도와 우리나라 개신교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며, 1887년 언더우드와 함께 우리나라 개신교 최초의 세례를 행하였다.

헐버트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교육을 조선의 가장 시급한 과제로 꼽았다. 그는 육영공원 교사, 한성사범학교 교장, 관립중학교(현 경기고등학교 전신) 교사 등을 역임하면서 교과서 시스템을 정착시키는 등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초석을 놓았다. 1905년 을사늑약으로 대한제국이 주권을 빼앗기자 ‘한국의 살길은 교육뿐’이라며 한국인들에게 교육에 전념하여 나라의 주권을 되찾을 것을 호소했다. 헐버트는 또 학교교육을 넘어 모든 백성이 골고루 교육을 받아야 한다며 국민교육을 주창하였다. 그는 1903년 YMCA 창립총회 의장으로서 YMCA 탄생의 주역이었다.

헐버트는 1889년 지리, 사회 총서인 《사민필지》라는 우리나라 최초의 순 한글 교과서를 저술하여 육영공원에서 교재로 썼다. 그는 한글을 현존하는 문자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자 중의 하나라고 정의하였으며, 또한 조선인들에게 어려운 한자 대신 쓰기 쉬운 한글을 애용할 것을 주창했다. 그는 1892년 <한글(The Korean Alphabet)>이라는 논문을 필두로 한글에 관한 수많은 논문을 발표하였고,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를 인류사에 빛나는 업적으로 보았다. 그는 또 1세기 훨씬 전부터 국제적인 신문 및 학술지에 한글의 우수성을 소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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