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예수님을 종종 동물에 비유하시는 경우가 있습니다. 유대지파의 “사자”(lion)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왕 되심을 백수의 왕 사자로 비유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제물이 되신 예수님을 어린양으로 비유하는데,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세상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라고 선언하였습니다. 교회사 속에서는 놀랍게도 예수님을 “펠리컨”에 비유하였습니다. 중세의 저명한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가장 커다란 모성애를 가진 조류 펠리컨을 예수님에 비유하여 우리를 위하여 “성찬의 살과 피”를 주신 예수님을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습니다.

“사랑 깊은 ‘펠리컨’ 주 예수/ 더러운 저, 당신 피로 씻어 주소서./ 그 한 방울 만으로도/ 온 세상을 죄악에서 구해주셨네.

펠리컨은 본능적으로 깊은 모성애를 가진 새입니다. 부리 아래에 주머니가 달려 있는 펠리컨은 위장이 담을 수 있는 양의 무려 3배나 더 이 주머니에 담을 수 있습니다. 펠리컨의 주머니는 먹이를 잡을 때 사용할 뿐 아니라, 새끼들에게 먹이를 줄 때도 사용합니다. 북극 지방에 햇빛이 잠깐 비추는 추운 수개월 동안, 먹이를 이 주머니에 저장하여 새끼들에게 먹이를 나누어 주어 겨울을 나게 합니다.

그러나 겨울을 나기 전에 먹이가 떨어지면, 펠리컨은 제 가슴살을 찢어 새끼들에게 먹입니다. 병에 걸려 죽어가는 새끼에게는 자신의 핏줄을 터뜨려 그 피를 입에 넣어줍니다. 어미 펠리컨은 자신은 죽어가면서도, 새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칩니다. 그래서 서양인들은 펠리컨을 사랑과 희생의 상징으로 여깁니다. 19세기 프랑스의 천재시인 알프레드 드 뮈세는 펠리컨을 다음과 같이 노래합니다. “자신의 가슴을 찢고 흐르는 피를 먹여 아기를 살리는 새가 있다네. 오 펠리컨의 슬픔이여, 오 펠리컨의 사랑이여.”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주셨습니다. 목자 되신 주님은 우리에게 필요한 꼴, 필요한 목초를 주시는 분이실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하여 자신의 몸을 생명의 양식으로 주신 분입니다. 예수님의 몸은 우리를 위한 양식이 되었고, 그 분의 피는 우리를 위한 음료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가슴살을 뜯고 자신의 피를 터트려 새끼를 살리는 펠리컨처럼, 예수님은 자신의 죽음을 통하여 참된 삶을 우리에게 나누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누구에게 눌려서 그렇게 하지 않으셨고, 자발적으로 자신의 생을 우리의 영원한 생명을 위하여 주신 것입니다. 성찬의 떡을 받으면서 눈물에 젖은 채, 예수님께 감사합니다. 성찬의 포도즙을 받으면서, 그 사랑에 감격 하면서 이웃을 사랑하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