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많은 일들이 일어납니다. 뉴스를 봐도, 네이버의 초기 화면을 봐도, 세상에는 많은 사건들과 사고, 변화가 있습니다. 슬프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고, 기쁘기도 하고, 걱정되기도 한, 하루하루가 복잡다단하게 진행되는 것을 봅니다. 정신이 없기도 합니다.

그런데 세상의 많은 일들을 내가 어떤 눈으로, 어떤 관점으로, 어떤 마음으로 보는가가 중요한 것 같습니다. 어려울 때가 있으면 평안할 때도 있고, 슬픈 때가 있으면 기쁠 때도 있습니다. 지금은 힘들어도 후에는 나아지기도 하고, 지금은 잘되는 것 같아도 나중에는 더 어려워지기도 합니다. 어떤 가치관과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는지에 따라 행복의 기준도 달라지고, 삶의 의미도 달라집니다.

<상식파괴자>(그레고리 번스 저, 비즈니스맵)에 보면 예순여섯의 나이에 공방 유리공예 운동의 전설적인 존재가 된 데일 치후리가 나옵니다. 치후리는 대칭성이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겨지는 유리공예의 세계에서 비대칭적의 세계를 구현하고, 전통적인 유리 불기 기술을 버리고 상식과 전통을 깬 특별한 작품을 창조했습니다. 남들이 보는 것처럼 보지 않고, 남들이 하는 방법대로 하지 않는 치후리만의 독특한 세계를 구현한데에는 그에게 일어난 사고가 계기가 되었습니다.

1976년에 치후리는 영국을 여행하다가 차량 충돌로 자동차 유리를 뚫고 튕겨나가는 사고를 당합니다. 그 사고로 그는 왼쪽 눈을 실명하게 되고, 시야의 주변부에 대한 시력을 잃어버리고 한쪽 눈으로만 보아야 되는 한계를 갖게 됩니다. 거리감도, 대칭감각도 떨어지는 육체적 변화를 겪으면서 치후리는 사물과 상황을 다르게 보게 되고, 결국은 치후리만의 독특하고도 탁월한 세계를 창조하게 됩니다. 물론 많은 고난과 고통도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가 나고 1년 정도 후에 그는 서핑을 하다가 또다시 오른팔이 탈구되는 사고를 당합니다. 치후리로서는 상황과 환경에 계속 꼬이고 힘들고 좌절할만하지만 낙심하지 않습니다. 도리어 새로운 관점, 새로운 작업, 새로운 방법을 계발하고 결국은 루브르 박물관에서 단독 쇼를 선보일만큼 위대한 예술가로 거듭나게 됩니다. 치후리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과 한계를 뛰어 넘는 역전의 인생을 보여줍니다.

프랑스의 초현실주의 작가 마르셀 푸르스트는 “진정한 발견의 항해는 새로운 땅을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눈을 갖는 것이다”라는 말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보이고 만져지는 세계가 전부가 아니라 어떻게 보고 어떻게 해석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가데스 바네아의 12명의 정탐꾼들의 보고는, 엘라 골짜기의 골리앗을 바라보는 사울의 군대와 다윗의 고백은, 갈릴리의 풍랑에서 휘둘리는 배에 탄 제자들과 예수님은 대조적인 태도와 행동을 보여줍니다. 상황과 환경을 문제로 볼 것인가? 은혜로 볼 것인가? 사람을 믿을 것인가? 하나님을 의지할 것인가? 불행인가? 기회인가? 점쟁이의 인생관인 모든 사람의 운명은 날 때부터 정해져 있다는 ‘결정론적 운명론’을 따를 것인가? 모든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난 하나님의 걸작품인 ‘창조적 운명론’을 따를 것인가?

내게 주어진 고난과 광야는 분명 힘들고 어렵습니다. 고통스럽습니다. 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눈’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눈으로 고난을 바라보는 소망, 하나님의 신실하심으로 삶을 이해하는 믿음, 하나님의 마음으로 현실을 해석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