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초기 회중교회의 지도자였던 존 코튼과 미 침례교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로저 윌리암스의 역사적 발자취를 찾아 후배목사와 함께 뉴잉글랜드 지방 여행을 하고 돌아왔다. 주마간산(走馬看山)이기는 하지만 미국 교회의 역사적 고향을 견문하기에는 족한 시간이었다.

사실 미국에 공식적으로 제일 먼저 도착한 사람들은 1620년 메이플라워호로 플리머스항에 도착한 청교도들이 아니라, 1607년 5월 14일 버지니아에 도착한 104명의 영국인들이었다. 그러니까 청교들보다 13년이나 먼저 미국에 도착한 셈이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제임스타운이 아닌 오늘날의 노폭근처이다. 이곳에 버지니아 주정부는 1st Landing Memorial Park을 만들어 관광명소로 삼고있다.

우연히도 뉴잉글랜드를 방문한 다음 주에 연이어 이곳을 방문하게 되어 미국 역사의 현장을 두루 학습하게 되는 행운을 가지게 되었다. 해수욕을 하면서 저멀리 가물 가물 보이는 체세페잌만의 긴다리를 보면서 그 옛날 일단의 범선단들이 이 좁은 해협으로 들어오는 상상을 해보았다. 그들을 태우고 온 스미스선장은 대단한 모험가로 버지니아 습지를 정찰, 해로를 작성하면서 미 북동부를 샅샅이 탐험하였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미국의 역사의 고향은 뉴잉글랜드 지방, 특히 보스톤지역이 아니라 버지니아 남부인 것이다. 다만 이 지역에 온 첫이민자들은 종교의 박해를 피해서 온 사람들이 아니라 경제문제로 식민회사의 도움을 받아 이민오게된 자들 이었다.

반면에 16세기 초 영국의 종교적 혼란기에 청교도라고 불리는 일단의 사람들이 영국의 국교회인 성공회의 핍박을 피해 1607년 화란의 레이덴에 망명을 하였다. 그들은 화란 당국으로부터 피난처를 제공받은 것이다.

그러나 화란인들의 차별에 불만을 품은 청교도 일부가 신대륙으로 떠날 결심을 하게되고 1620년 101명의 남녀와 어린이가 메이플라워호를 타고서 버지니아를 향해 떠났으나 폭풍우에 떠밀려 뉴잉글랜드의 케이프코드에 상륙했던 것이다.

그들은 정착지에서 지켜야 할 법인 '메이플라워 맹약'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미국 헌법의 기초가 된다. 이들은 도착하자마자 월동할 정착촌을 건설하였으나 다음해 추수를 보지 못하고 거의 반이나 되는 사람들이 얼어죽거나, 질병으로 죽었다. 다행이도 인디언들이 옥수수 재배법을 그들에게 가르쳐 주어서 다음해 가을에는 풍족한 옥수수 수확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플리머스시 입구에는 초기 정착민들과 인디언들의 생활상을 담은 민속촌이 있어 그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수 있게 하였다. 당시의 생활상을 똑같이 연기하는 배우들이 매우 신기하였다. 한 관광객이 한 여배우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고 사진을 찍으려 하자 ‘남편이 보면 당신 혼쭐이 날것’이라고 너스레를 떨어 폭소를 자아냈다. 이후 1630년에는 새로운 이민의 물결이 매사추세츠만에 도착하여 뉴잉글랜드의 전성기를 향해 문을 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