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홍길동전을 기억하십니까? 저는 홍길동전에서 인상 깊은 장면이 서자 홍길동이 마당에서 아버지께 마지막 인사를 드리는 장면에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서자의 서러움을 아버지께 고백하는 장면입니다.

그때 아버지가 ‘호보호형을 허하노라’ 하는 장면에서 본처의 자식이 아닌 여종에게서 난 서자인 홍길동이지만, 그래도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마음을 보았습니다. 찬송가 405장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곡가인 존 뉴턴이 회심하고서도 아프리카 사람들을 노예로 파는 자신의 직업을 버리지 못했던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그러면서 자신 같은 죄인까지 용서하신 아버지의 사랑에 엎드려 무릎 꿇는 그의 고백에서, 저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 모든 일이 어떻게 가능한 일입니까? 어떻게 무익한 종 같은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나 같은 죄인을 자녀삼아 주신 것입니까? 갚을 수 없는 죄의 값을 주님께서 치르셨기 때문임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고 계신가요?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골고다 언덕을 아십니까? 골고다는 ‘해골의 곳’이라는 뜻입니다. 해골을 먼저 머리에 이미지로 그려보십시오. 주님께서 달려 돌아가신 곳이 골고다, ‘해골의 곳’이라는 것은 영적인 의미가 깊습니다. 단지 자주 사형을 행하던 곳이어서 일까요?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 말씀의 단어 하나하나에서 우리는 깊은 영적인 의미가 심겨져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해골의 언덕 꼭대기에 십자가,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기어이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십자가의 의미는 사형입니다. 예수님께서 골고다에서 십자가를 지심은, 해골에 십자가를 꽂으신 것입니다. 옆에 종이가 있다면 해골을 그려보십시오. 그리고 그 해골꼭대기에 십자가를 그려보십시오. 무엇입니까? 해골, 사망에게 사형을 명하신 것입니다. 죽음에게 사형을 선고하신 것입니다. 영원히 죽을 사망의 권세에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사망의 권세에 사형을 명하시므로, 우리에게는 죽음이 없게 된 것입니다.

목회현장에서 자주 접하게 되는 일 중에 하나가 장례식입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들이, 그리고 식구들이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얼마나 아쉽고 슬픈지 말로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그리고 나서도 채워지지 않는 허전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에게는 죽음이란 없다는 사실입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죽음에게 사형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우리에게 없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세상을 떠나는 성도들에게 ‘잔다’라고 표현하신 것을 기억하십시오. 우리 모두 언젠가 이 세상을 떠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죽음은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을 뿐입니다.

한 어머니가 세 아들을 두었답니다. 첫째 둘째 아들은 예수를 믿지만, 막내 아들이 믿지를 않습니다. 임종을 앞둔 어머니가 아들들을 불러 작별인사를 합니다. 첫째 아들에게 “Good Night, My son” 합니다. 둘째 아들에게도 같은 인사를 합니다. 이제 곧 볼 거라는 믿음으로 그렇게 인사를 하십니다. 그러나 막내 아들에게는 “Good Bye , My son” 합니다. 막내 아들이 통곡을 하며 묻습니다. “엄마 왜 내게는 Good Bye를 하시는 거예요?” 그러자 어머니가 “너는 예수를 믿지 않으니 이제 이별이구나” 합니다. 그제서야 막내 아들이 울면서 고백합니다. “엄마, 나도 예수를 믿을게요. 내게도 Good , Night 해주세요.” 그제야 어머니는 막내 아들에게도 “하나님 감사합니다. 오 나의 아들 Good Night” 하고 천국으로 가셨다는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런 일이 분명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믿음의 식구들에게는 “Good Bye”는 없습니다. “Good Night”만 있습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