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브라함은 이민자입니다. 대체로 이민은 좀 더 잘살고 좀 더 편안한 삶을 누리기 위하여 떠나는 것이 일반적인 모습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경우는 좀 다릅니다. 당시의 해변도시 우르는 이미 발전된 도시요, 사람이 많이 사는 도시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작은 가나안으로 아브라함의 이민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차라리 갈 바를 모르고 가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여, 가나안 땅이라는 목적지의 장소를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고대사회 속에서의 이민은 인권을 보장받을 수 없는 상황이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아름다운 아내 사라를 빼앗기는 것은 물론이요 사라 때문에 아브라함의 생명을 잃을 수도 있기에 아브라함과 사라는 비밀리에 모종의 계략을 세웁니다. 아브라함은 사라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가는 곳마다 그대는 나를 그대의 오라비라 하시오 이것이 그대가 내게 베풀 은혜입니다”(창 20:13)라고 말합니다.

이민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생명을 부지하기 위하여 이 같은 장치를 해놓은 것이 약간의 도움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편 아브라함이 자기의 생명을 겨우 부지했을지 모르나 두 번이나 아내를 빼앗기게 됩니다. 한 번은 이집트의 왕 바로(창 12장)에게, 다른 한 번은 가나안의 왕 아비멜렉(창 20장)에게 자신의 아내 사라를 내어주는 피치 못할 사정이 발생하게 됩니다. 약속의 후손을 받고 큰 민족을 이룰 열국의 아비가 자신이 꾸민 계략으로 아내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는 가슴 아픈 상황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있어서 이민 생활은 힘든 삶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모든 아버지는 앞장서서 이민 사회의 파도를 극복하여 나아가는 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습니다. 그러나 언어장벽에 의하여, 때로는 두려움에 의하여, 때로는 문화적인 이질감에 지혜롭게 적응하지 못하므로 아버지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생가슴을 앓는 아브라함과 같은 위기, 겨우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라는 기적적인 예언을 받아들고는 그 아내를 남의 아내로 시집보내야 하는 남편의 참담한 심정은 우리 이민의 아버지들의 가슴앓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께서 가만히 계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열국의 아비 아브라함의 얼굴을 들게 하십니다. 꿈을 통하여 바로와 아비멜렉을 경고하시고 아내 사라를 그 남편 아브라함에게 돌려주라고 명령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기도하게 하시고 아비멜렉의 아내와 여인들의 태를 여심으로 아브라함이 선지자 됨을 증명하십니다. 아버지의 얼굴을, 남편의 얼굴을 들게 하시는 분이 바로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