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들은 한국 크리스천의 기도가 ‘주시옵소서’만 연발하는 기복적인 신앙이 농후하다는 비판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시옵소서’하는 기도자체가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다만 ‘~주시옵소서’기도가 온통 ‘내 욕심을 채워주시옵소서’라면 문제가 있겠지만,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주시옵소서’라는 기도라면 얼마든지 주시옵소서를 외쳐야 할 것입니다.

그럼 어떤 기도가 바른 기도일까요? 우리는 정말 제대로 된 기도를 하는 것인가, 어떻게 바른 기도의 기준을 찾을 수 있을까요? 신학교에서 공부할 때, 국문학을 전공하신 한 교수님은, 우리말 성경에 대해서, 바른 번역을 위해서 남다른 열정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휘호(徽號)가 특이한데 백도천경(百禱千經)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뜻이냐면, 백번의 기도를 위해서는 천 번의 말씀을 먼저 읽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바른 기도는 분명 말씀에 기초해야 한다는 가르침이셨는데, 너무 인상적이어서 십 수 년이 지났어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로버트 벤슨이란 분도 “만일 우리가 생활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그러면서 하나님께 지령과 지시를 내리며 그것을 감히 ‘기도’라고 한다면, 우리가 하나님께 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 대답을 들을 수는 없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바른 기도의 첫 번째 기준은, 다시 말해 응답받는 기도는 하나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내 생각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기도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그런 면에서 기도는 그야말로 듣는 것입니다. 기도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이라면, 철저히 하나님의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은 말씀에 기초해서 기도를 해야 할 뿐 아니라, 기도 후에 응답에 있어서도 철저히 하나님의 결정을 당연히 존중하고 순종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기도가 바른 기도인지는, 두 번째 기준은 기도한 사람의 기도후의 모습에서 알 수 있습니다. 엘가나의 아내 한나가 자식이 없어서 성전에서 간절한 기도를 드렸습니다. 하나님께 아들을 주십사 기도를 했을 때에, 신령해 보이지도 않는 엘리 제사장이지만 “하나님이 허락하시기를 원하노라”는 한 마디에 한나가 다시는 근심하지 않았다는 말씀(삼상1:18)이 나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도자의 자세입니다. 기도했으면 기도의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기도를 하면서도 혼자 끙끙대고 근심한다면 그것은 기도가 하니라 하소연일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기도를 하지만, 우리 마음속에 100% 확신이 생겨서 갑자기 근심이 사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진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서도 염려에서 헤어 나오지 못한다면 하나님께서 “왜 나를 믿지 못할까?”하시며 안타까워하시지 않겠습니까? 염려하기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한 후에는 “하나님의 뜻대로 하옵소서”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기도라는 차원에서, 다윗의 기도를 통해서도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배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의 죄를 책망하기 위해 나단 선지자를 보내셔서 “밧세바와 동침해서 낳은 네 아들이 죽게 될 것이다”고 하셨을 때,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해서 아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며, 금식하면서 하나님께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슬퍼하며 울부짖던 다윗 왕이 정작 왕자가 죽었다고 하자, 목욕을 하고 식사를 합니다. 신하들은 의아해 합니다. 왕자가 죽었으니, 다윗 왕이 더욱 슬퍼하고 금식할 줄 알았는데, “왕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의연하실 수 있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때 다윗의 대답에서 기도의 응답에 대한 기도자의 자세를 보게 됩니다. “아이가 살았을 때는 내가 금식하고 울면 하나님께서 불쌍히 여기실까봐 그랬지만, 이미 데려가셨으니 나는 아들에게 가지만, 아들이 내게 올 수는 없지 않은가 ?(삼하12:22-23)”. 기도의 자세가 바로 이것입니다. 내 뜻대로 되는 것이 기도의 응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되는 것이 기도의 응답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면서도 기어이 ‘아버지의 뜻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기도의 응답이 내 기대와 다르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선하시니 하나님의 뜻을 철저히 인정하는 것 그것이 기도의 바른 자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셨을 때만 ‘할렐루야 아멘’ 하며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도 감사할 일이지만, 가져가시는 것도 찬양할 일입니다. 이것이 바로 욥의 고백이요 우리의 고백이 되어야 합니다. “주신이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욥1:21)”. 이런 고백과 자세가, 쉽다고 하는 것 아닙니다. 어렵기 때문에 여기에 우리의 믿음이 필요합니다. 주신 것도 감사요 찬양할 일이지만, 가져가신 것도 반드시 감사와 찬양의 제목임을 고백할 수 있다면, 그 믿음에 어찌 천국의 기쁨을 늘 주시지 않겠습니까? 기도를 통해서 이 땅을 살지만 천국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