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음식점에 가면 먹게 되는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짜장면입니다. 쫄깃쫄깃한 면에 갖은 양념을 버무린 달콤 새콤한 검정 소스를 얹어 먹는 짜장면은 언제나 우리의 입맛을 살리는 한국인이 즐겨먹는 기호식품입니다. 어느 중국 음식점에서 식객들이 이 짜장면을 앞에 놓고 갑론을박하는 것을 TV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내용인즉 ‘짜장면’이 맞느냐 ‘자장면’이 맞느냐라는 논쟁이었습니다. 일반적으로 ‘짜장면’이라고 불리지만, 바른 음식명은 ‘자장면’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장면’이라고 불어야 된다는 논리가 있었습니다. 또 통상적으로 ‘짜장면’으로 불리고 있으니 굳이 ‘자장면’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는 노리가 팽팽히 맞서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재미있었습니다. 식객들이 침을 튀기며 설전에 설전을 벌이고 있는 사이 사회자가 날린 멘트가 압권이었습니다. “중요한 것은 여러분이 드시는 것이 짜장면이냐 자장면이냐가 아니라, 맛이 있느냐 없느냐가 아닐까요?”

TV를 보면서 한참을 웃었습니다. 그러다가 번뜩 한 생각이 스쳐지나갔습니다.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무지’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지혜로운 인생은 핵심을 볼 줄 아는 자가 아닐까 합니다. 전문성이란 말은 ‘핵심’을 볼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핵심이 보이지 않으면 주변잡기만이 눈에 들어올 뿐입니다. 주변잡기를 핵심으로 오해하고 그것에 집중하는 자가 아마추어요, 때론 미련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오해가 바로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무지’의 행위를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어릴 때 재미있게 읽었던 동화책 중 하나가 ‘걸리버 여행기’입니다. 걸리버라는 사람이 세상을 여행하면서 겪는 일을 판타지적으로 표현해 낸 우화적인 동화입니다. 걸리버가 작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소인국’을 여행했습니다. 걸리버가 소인국에 들어서기 바로 직전 소인국은 엄청난 내전을 겪은 직후였습니다. 온 나라 국민들이 두 패로 나뉘어 피 튀기는 전쟁을 벌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삶은 계란을 까먹는 순서’ 때문이었습니다. 한 패는 ‘삶은 계란을 위에서부터 까먹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다른 패는 ‘삶은 계란은 밑에서부터 까먹어야 된다’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결국 이것 때문에 서로 죽이면서 싸우는 대 전쟁이 소인국에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 부분을 표현한 작가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거는 무지’를 지적한 것입니다. 핵심을 꿰뚫는 통찰력의 부재는 이렇게 허망한 결과를 양산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시대를 책임지며, 하나님 나라를 확장해야 하는 그리스도인들은 ‘핵심을 꿰뚫는 눈’을 계발하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핵심을 꿰뚫는 예리함이 사라지지 않도록 영적인 자리에 설 줄 알아야 합니다.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분별할 줄 아는 것이 ‘핵심을 꿰뚫는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릴 줄 아는 능력’이 ‘핵심을 꿰뚫는 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장인 4장에 앗시리아의 수도였던 큰 성읍 니느웨 백성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실로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던 그 중요한 이유를 하나님은 설명하십니다.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삶이 바로 ‘핵심을 꿰뚫지 못하는 눈’을 가진 자를 뜻합니다. 생각해 볼수록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핵심을 꿰뚫는 안목’이 시급한 시대를 살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