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도요 살인자로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 안에 있던 한 죄수가 있었습니다. ‘바라바’라는 죄인으로 자신이 저지른 죄에 대한 후회와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짓눌려 하루하루를 마음을 졸이며 보내고 있습니다. 간수의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이제 사형이 집행되는 것은 아닌가 불안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간수들이 들이닥치더니 감옥 문을 열고서는 다짜고짜 나오라는 것입니다. 이제 사형이 집행되는 줄로 생각한 바라바는 두려움에 심장이 방망이처럼 뛰고 몸이 점점 굳어지기 시작합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온 몸에는 식은땀이 흐르고 걸음은 한 발자국도 옮겨지지 않아 꼼짝도 할 수가 없습니다. 간수의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감옥에서 나오게 된 바라바는 놀라운 해방의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죽어야 할 자기 대신에 예수가 죽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는 자유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라바’는 자기는 아무 것도 한 일 없이 예수님 때문에 그냥 은혜로 해방을 얻었고 생명을 얻었습니다. ‘바라바’라는 뜻은 “사람의 아들”이란 뜻입니다. 사람의 아들, 아담의 자손인 우리가 바로 ‘바라바’가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죄와 가난과 저주와 질병의 감옥에 갇혀 죽음의 두려움 가운데 사는 존재였습니다. 아무리 수양을 하고, 도덕을 쌓고, 교육을 받아도 내 지체, 피 속에 있는 죄악의 법을 이길 수가 없습니다. 아무리 목욕탕에서 목욕을 잘 하여도 죄는 닦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의사가 수술을 잘 하여도 죄를 도려 낼 수 없습니다. 아무리 페인트칠을 잘 하여도 죄를 덮을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학교에 가서 공부를 잘 하여도 죄를 없앨 수 없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모여 큰소리를 지르며 월드컵의 승리를 만끽해도 죄 사함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바라바’ 같은 인생이 참된 해방과 자유를 얻는 길은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밖에 없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므로 ‘바라바’가 해방 된 것처럼,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들도 죄와 사망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마음의 문을 열고 예수님이 다 이루신 십자가의 대속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위대한 새 생명의 역사는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것입니다. 계3;2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 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한 가지, 내가 예수의 생명을 받아들이기 위해 마음의 문을 열어야 하는데, 여기에 저항이 있습니다. 자기 옛사람의 저항, 세상의 저항, 원수마귀의 저항, 이것을 이기고 마음의 문을 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어떤 분은 교회 생활을 오래 해서 예배드리는 겉모습이 아주 세련되고 자연스러운데도 실상은 마음의 문을 아직 열지 못한 사람도 있습니다. 반대로 교회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겉모습은 울퉁불퉁 하지만, 오히려 간절함으로 마음의 문을 열 고 예수님의 생명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모양만 있고 생명이 없는 종교인이 되면 안 됩니다.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있는 새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생명이 내 안에 있으면 감사가 터지고, 기도와 찬송이 나오고, 진정한 기쁨이 생깁니다. 내 안에서부터 흐르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꿈이 있고 할 수 있다는 믿음이 넘쳐나는 것입니다. 참된 자유와 해방은 종교적 훈련으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의 힘에 의해 내 안에서부터 나타나는 것입니다. 바로 내가 죄와 사망의 감옥에서 벗어나 참된 해방과 자유를 누리는 ‘바라바’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