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한 도시에 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는 어느 날 함부르크에 출장을 갔다가 한 상인의 딸이었던 아리따운 처녀를 만나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청년은 얼굴도 잘 생기지 못했고, 체구도 작은데다, 기이한 모습의 꼽추였기에 그 아리따운 처녀는 그 초라한 청년에게 눈길조차 한번 주지 않았습니다. 이제 업무를 마치고 집으로 가야하는 마지막 시간에 그 청년은 용기를 내어 그녀를 찾아갔습니다. 그는 그녀를 만나 몇 차례 대화를 시도했으나 그녀는 대꾸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그 청년은 마지막으로 그 아가씨에게 물었습니다. “당신은 결혼할 배우자를 하나님이 정해주는 것 믿나요?“ “그런데요, 그게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죠?” 그녀는 차갑게 대답하였습니다. “저에게도 하나님이 미래의 신부를 정해주셨습니다. 하지만 너의 미래의 신부는 꼽추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죠. 저는 그 때 “하나님 안 됩니다. 그 여인이 꼽추가 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차라리 나를 꼽추로 만들어 주시고 나의 신부는 아름다움을 주십시오. 그렇게 해서 나는 꼽추로 태어난 것입니다.” 그 순간 그녀는 고개를 돌려 그 청년의 순수한 눈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가만히 다가가 손을 잡았습니다. 훗날 그녀는 그 청년의 헌신적인 아내가 되었습니다. 그 사람이 바로 독일의 유명한 음악가 멘델스존의 할아버지 모세 멘델스존이었습니다.

언어의 힘이 이렇게 위대한 것입니다. 만일 모세 멘델스존이 그토록 아름다운 언어로 그녀에게 나가지 못했다면 우리는 결혼식 때마다 울려 퍼지는 결혼 행진곡의 아름다운 선율을 들을 수 없었을 지도 모릅니다. 철학자 하이데거는 언어는 인간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하였습니다. 우리가 그냥 사람을 봐서는 잘 모르지만 말을 시켜보고 들어보면 그 사람의 됨됨이를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을 고용할 때 인터뷰를 하고, 젊은 남녀가 맞선을 볼 때 대화를 나누어 보는 것입니다. 누에는 자기 입에서 나오는 실로 집을 짓고 살고 있습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언어로 그의 존재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신앙인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쓰는 언어가 그의 인격을 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가 축복의 통로가 되려면 축복의 언어를 써야한다고 믿습니다. 특히 부모의 책임 중에 가장 큰 것은 자녀를 축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로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축복의 권세를 사용해야 자녀들이 축복 가운데 자라게 됩니다. 어떤 부모가 자기 아이에게 심하게 꾸짖으면서 “입닥쳐!”라고 했는데 그 아이가 후에 충격을 받아 자폐증 장애가 있게 되었다는 예기를 들었습니다.

자녀들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웃과 친구들을 향해서도 축복하면서 살아야합니다. 우리가 축복의 언어를 자꾸 사용하면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을 자꾸 저주하면 그것이 나의 저주가 될 수 있습니다. 현대는 설득의 시대라고 합니다. 설득은 언어가 마음에 부딪혔을 때 일어나는 결과입니다. 대화를 나눌 때 내 말이 상대방의 마음에 통하지 않으면 괜히 마음까지 멀어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말을 잘해야 합니다. 그러나 말을 잘한다는 것은 말을 유창하게 많이 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마음이 통하는 언어를 쓰라”는 말입니다. 단지 의미 없는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수다쟁이가 되거나 기껏 상대방을 위해 해준다는 말이 남에게 상처를 주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말을 잘하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내가 사용하는 언어로 남을 세워주고 섬기는 일을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남에게 언어를 통해 용기를 주고 축복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즈음 나의 언어생활 몇 점을 줄 수 있을까요? 혹시 우리들은 나의 자녀, 남편, 가족, 이웃을 향해 더럽고 누추한 언어를 사용하지 않았습니까? 자신을 돌아보며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고, 언어로 누군가를 섬기는 아름다운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