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우리는 살면서, 특히 선한 목표를 갖는 삶을 추구할수록 ‘자신’을 버리라는 조언을 많이 듣게 된다. 우리가 남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며, 자신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은 진심으로 남을, 다른 어떤 것도 사랑할 수 가 없다. 자신을 아무 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한다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거스르는 것으로, 이러한 자기비하적인 생각을 가지고는 도무지 사랑이라는 고귀한 행동을 낳을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진심으로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가? 무엇인가를 미치게 사랑해 보고 싶지 않은가? 오늘, 참으로 매력 있는 제안 하나를 해보려 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가?
모든 생물체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생물체를 구성하는 유전자의 본성이며, 그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성으로 인해 생물체가 38억년이 넘도록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다른 개체나 집단,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무리이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고픈 욕구를 억제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극심한 욕구불만은, 많은 이들에게 아예 선한 일을 외면하든지 무시하며 살도록 강요한다. 혹은 뭔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보려 노력하는 이들을 심한 죄의식이나 자포자기로 몰아넣기도 한다.
이 시간, 우리가 우리의 소욕대로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도 진정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 하나를 제시하려고 한다.
자신을 마음껏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면, ‘자신’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만 한다. 인간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다. 그것이 당신이 인간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3요소 중 한 가지라도 없으면 인간임을 자랑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이 세 가지를 다 사랑하여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우선, 육체를 사랑해 보자. 육체는 아무리 길어도 이 우주상에 100년 이상 존재하기 힘들다.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하고, 실컷 자고……. 이러한 욕구는 거의 동물 수준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갖고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그것으로 인해 울고 웃으며 좌절하고 고통하고……. 잠시 기분이 좋고자, 위로를 얻고자, 술 마시고 마약도 하고 쾌락에 탐닉하고……. 편한 것, 몸에 좋은 것, 정력에 좋은 것 등을 찾아 헤매게 된다. 육체만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람은 저급하고 초라해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행위는 아니다.
정신은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이는 부분으로,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의 듣고, 열심히 공부하고, 문화를 사랑하며 예술도 사랑한다. 자신의 정신세계에 치중하여 그것을 남과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비교적 정제된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 끝없이 지식을 축적해가는 모습도 역시 정신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공을 들인 대부분의 정신은 육체와 함께 사멸되며, 여간해선 인류사에서 세인에게 기억되며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영혼(또는 영)은 이 우주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된 것이 아니며 불멸이라고들 표현한다. 영혼은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요소이며, 우리 인간과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요소이다. 영혼을 사랑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정제하거나 정량해낼 수 없는 이 요소를 알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는 초지식의 영역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혹은 역사에서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가꾸어 간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존경하며, 흔히 위인 또는 성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의 삶은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고귀한 희생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나’이다. 어떤 ‘나’가 진정한 ‘나’인가. 육체와 정신은 ‘나’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보기는 어렵다. 진정한 나는 영혼인 것이다. 다른 말로는 육체와 뇌에서 생성되는 정신은 모두 이 세상의 입자들을 끌어모아 된 것으로, 본디 없었던 것으로 다시 없어져 버릴 것이며 진정한 ‘나’인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자신인, 자신의 영혼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오래지 않아 영혼을 사랑하는 행위가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고 희생하며 나눌수록 영혼은 건강해지게 된다. 영적인 거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성서에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 1:3)라고 말하고 있다. 영혼이 잘 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당신의 본질을 진정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아침, “진정한 에고이스트로 다시 한 번 태어나 보는 것은 과연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한 시라도 남을 사랑하고 섬기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런 인생들을 사는 세상을 꿈 꿔 본다.
생각해 보라, 진심으로 당신은 사랑받을 만한가? 무엇인가를 미치게 사랑해 보고 싶지 않은가? 오늘, 참으로 매력 있는 제안 하나를 해보려 한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이기주의자가 되어보라는 것이다. 과연 그런 일이 가능한가?
모든 생물체는 본능적으로 자신을 사랑하도록 되어 있다. 이것이 생물체를 구성하는 유전자의 본성이며, 그 자신을 보존하려는 본성으로 인해 생물체가 38억년이 넘도록 지구상에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다른 개체나 집단, 대의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지극히 무리이다. 단지 인간이라는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고픈 욕구를 억제하면서 살아야만 하는 극심한 욕구불만은, 많은 이들에게 아예 선한 일을 외면하든지 무시하며 살도록 강요한다. 혹은 뭔가 아름다운 삶을 살아보려 노력하는 이들을 심한 죄의식이나 자포자기로 몰아넣기도 한다.
이 시간, 우리가 우리의 소욕대로 자신을 마음껏 사랑하고도 진정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삶을 살아가는 방법 하나를 제시하려고 한다.
자신을 마음껏 사랑할 준비가 되었다면, ‘자신’이 무엇인지부터 알아야만 한다. 인간은 세 가지 요소로 되어 있다고 한다. 육체와 정신과 영혼이다. 그것이 당신이 인간임을 말해주고 있다. 이 3요소 중 한 가지라도 없으면 인간임을 자랑할 수 없다. 자신을 사랑하려면 이 세 가지를 다 사랑하여야 하겠지만, 현실적으로 이것은 가능하지가 않다.
우선, 육체를 사랑해 보자. 육체는 아무리 길어도 이 우주상에 100년 이상 존재하기 힘들다. 좋은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좋은 것 하고, 실컷 자고……. 이러한 욕구는 거의 동물 수준이다. 아름다운 육체를 갖고자 많은 시간과 비용을 투자하고, 그것으로 인해 울고 웃으며 좌절하고 고통하고……. 잠시 기분이 좋고자, 위로를 얻고자, 술 마시고 마약도 하고 쾌락에 탐닉하고……. 편한 것, 몸에 좋은 것, 정력에 좋은 것 등을 찾아 헤매게 된다. 육체만을 사랑하면 할수록 사람은 저급하고 초라해지는 것은 아닌가 한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의 행위는 아니다.
정신은 조금 더 가치 있어 보이는 부분으로, 정신을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책을 읽고, 좋은 강의 듣고, 열심히 공부하고, 문화를 사랑하며 예술도 사랑한다. 자신의 정신세계에 치중하여 그것을 남과 공유하고자 하는 노력도 아끼지 않는다. 비교적 정제된 아름다운 삶이 될 수 있겠다. 다른 한편으로는 인생의 출세와 명예를 위해 끝없이 지식을 축적해가는 모습도 역시 정신을 계발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렇게 공을 들인 대부분의 정신은 육체와 함께 사멸되며, 여간해선 인류사에서 세인에게 기억되며 영향을 줄 수 있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다.
영혼(또는 영)은 이 우주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된 것이 아니며 불멸이라고들 표현한다. 영혼은 대부분의 종교나 철학이 추구하는 형이상학적 요소이며, 우리 인간과 다른 생물을 구분하는 요소이다. 영혼을 사랑하려면,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우리가 정제하거나 정량해낼 수 없는 이 요소를 알기 위해서는 보다 많은 연구가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인식 한계를 넘어서는 초지식의 영역같이 보인다.
그렇지만 우리는 주변에서 혹은 역사에서 자신의 영혼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가꾸어 간 사람들을 기억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의 삶을 존경하며, 흔히 위인 또는 성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들의 삶은 공통적으로 이웃에 대한 사랑과 고귀한 희생으로 점철되고 있다.
이 세 가지 모두가 ‘나’이다. 어떤 ‘나’가 진정한 ‘나’인가. 육체와 정신은 ‘나’의 표현이긴 하지만 그것이 진정한 ‘나’라고 보기는 어렵다. 진정한 나는 영혼인 것이다. 다른 말로는 육체와 뇌에서 생성되는 정신은 모두 이 세상의 입자들을 끌어모아 된 것으로, 본디 없었던 것으로 다시 없어져 버릴 것이며 진정한 ‘나’인 영혼을 담는 그릇에 불과한 것이다.
진정한 자신인, 자신의 영혼을 사랑할수록, 우리는 오래지 않아 영혼을 사랑하는 행위가 사랑과 희생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사랑하고 희생하며 나눌수록 영혼은 건강해지게 된다. 영적인 거인이 되어가는 것이다. 성서에서 사도 요한은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범사가 잘 되고 강건하기를 간구하노라”(요삼 1:3)라고 말하고 있다. 영혼이 잘 되면 모든 것이 잘 되는 것이다.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당신의 본질을 진정 사랑한다면,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당신을 진정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을 곧 알게 되는 것이다.
이 아침, “진정한 에고이스트로 다시 한 번 태어나 보는 것은 과연 어떨까?”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리하여 사람들이 ‘한 시라도 남을 사랑하고 섬기지 않으면 입에 가시가 돋는’ 그런 인생들을 사는 세상을 꿈 꿔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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