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의 복음의 핵심은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는 부활 신앙에 있습니다.

기독교는 예수께서 바다위로 걸어 가셨던 일이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장정 5,000명을 먹이고 열두 바구니를 남기는 큰 기적을 베풀지 않았다 하더라도 기독교가 발전하는데 아무런 지장을 받지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예수님께서 인간의 죄악을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셨다하여도 그분께서 사흘 만에 다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기독교는 결코 존재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부활을 빼어 버린다면 사상이나 하나의 도덕 혹은 철학에 불과한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다면 그는 죄 없이 죽은 아까운 인물 혹은 성자 내지 영웅은 될 수 있을는지 모르나 우리를 죄악에서 구원하실 구세주는 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의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근본입니다. 로마서 10:9절“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구원은 예수님의 죽으심만 믿어서는 안 되고 예수의 부활까지 받아 들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지 않는 것은 아직 크리스천으로서의 신앙이 아닙니다. 아무리 교회에 열심히 나간다하더라도 그리고 교회에서 집사 권사, 장로 아니 목사의 직책을 받았다 하더라도 아직 마음으로 부활을 안 믿는 사람은 불신자요 아직 그 속에 영생이 없는 자입니다.

한 경건한 신문사의 편집장이 어떤 자매님으로부터 편지를 받았습니다. “부활절에 저희 교회 목사님이 설교하셨는데 예수는 십자가위에서 기절을 했을 뿐이고 제자들이 간호해서 그 분을 회복시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편집장은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자매님 귀하! “아홉 가닥으로 된 채찍으로 그 목사님을 서른아홉 번 매질을 하십시오. 그리고 그를 십자가에 매달으십시오. 그를 햇빛 속에서 여섯 시간 동안 매어 달아 놓으십시오. 창으로 그를 찔러 관통시키십시오. 그리고 그를 공기가 안 통하는 무덤에 묻고 72시간동안 놔두십시오. 그리고 나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지켜보십시오” 라고 썼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끊임없는 비진리와 비성서적인 사상과 철학에 도전 받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첫째, 복음을 믿어야하고 그다음에는 복음을 사수해야하고 셋째로는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부활의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생명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타난 학문 속에 권태를 느낀 회의자는 저 멀리서 은은하게 부활주일의 종소리와 아울러 찬양소리가 들려올 때 자살하려는 것을 중지하고 절망에서 돌이켰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메시지가 전해지는 곳마다 인간 개인의 삶의 부활, 정신적 인간관계의 변화, 부활체험을 합니다. 이 부활의 메시지가 온 남가주와 미국에 울러 퍼지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