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서의 세 번째 부분인 ‘성화(Sanctification)’ 어떻게 크리스천의 삶을 살 것인가? 를 공부 하고 있습니다. 이 공부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6장의 주제를 먼저 살펴야 합니다. 6장의 주제는 바로 죄의 능력과 크리스천의 삶입니다.

어떻게 이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를 얻을 수 있는가? 우리가 처음 예수를 믿을 때 우리에게는 죄를 이길 힘이 주어졌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어쩔 수가 없이 죄를 짓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떻게요? 로마서 6장을 보면 됩니다.

자 로마서 6장의 키워드가 죄라면 7장의 키워드는 율법입니다. 6장이 죄로부터의 자유라면 7장은 율법으로 부터의 자유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8장의 키워드는 성령이고 죽음으로 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습니다. 6장에서 1-6절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고, 7장 1-6절은 우리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사실을 병행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분문을 3부분으로 나눈다면 1-3절은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 하는 이유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4-6절은 율법으로 자유함을 얻은 결과는 무엇이며? 7-13은 율법의 목적은 무엇인가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I. 자 그럼 우리가 율법으로부터 자유 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대답을 하기 위해서는 먼저 율법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합니다. 율법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리고 구약에 하나님이 주신 모든 법을 말합니다. 의식법, 정결법, 사회법, 도덕률..등을 말합니다. 자 이 율법은 율법주위와는 구별이 되어야 합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과 율법주의는 다른 것입니다.

율법주의란 내가 어떤 것이든지 행위로 인해서 하나님으로부터 인정을 받으려는 조직화된 신앙 체계를 말합니다. 이것은 행위를 의지하는 잘못된 신앙관입니다. 오늘 본문은 형제들아~~ 라고 부르면서 시작 됩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네 믿는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말하는 겁니다.

(롬 7:1) 형제들아 내가 법아는 자들에게 말하노니 너희는 율법이 사람의 살 동안만 그를 주관하는 줄 알지 못하느냐

무슨 말입니까? 율법은 죽은 사람에게는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교통사고나 났다고 생각 해 봅시다. 그 운전자가 죽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죽은 사람에게 티켓을 끊는다는 거 이건 코미디입니다. 아무리 과실이 있다고 해도 죽은 사람에게 티켓 아니라 더한 것 요구해도 그 요구는 헛된 것입니다. 죽는 거 이상 무슨 패널 티가 있겠습니까? 사형선고 받은 사람에게 주차위반은 아무런 두려움도 못주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의해서 아무리 흉악 한 죄인이라도 한번 전기의자에 앉아서 집행을 받고 설령 그가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그를 다시 사형 시킬 법적근거는 없습니다. 바울은 율법과 크리스천의 관계를 결혼에 비유해서 들고 있습니다.

어떤 여자가 아주 나쁜 남자하고 결혼을 했습니다. 무서운 눈을 부릅뜨고 여자를 매일 때립니다. 노예처럼, 식모처럼, 여자를 부립니다. 이혼도 해주지를 않습니다. 목사로서 다루기가 가장 어려운 부분이 바로 이 의처증, 의부증이 있는 가정의 문제입니다.·한번 의심을 하면 풀지를 않습니다. 무섭고 잔인하게 대합니다.

그런 남편으로부터 이 여인은 도망도 못가고 이혼도 할 수 없습니다. 이 여자가 무슨 기도를 할까요? 남편에게 놓이기를 기도 할 것입니다. 자 그런데 2절에 보면

(롬 7:2)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났느니라
(롬 7:3) 그러므로 만일 그 남편 생전에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부라 이르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케 되나니 다른 남자에게 갈지라도 음부가 되지 아니하느니라

그런데 어느 날 못살게 굴던 남편이 죽었습니다. 그 순간부터 이 여인은 매를 맞지 않아도 됩니다. 남편이 죽었음으로 그 남편으로부터 그 여자는 해방된 것입니다. 이제는 이 결혼은 끝이 난 것입니다. 이제는 다른 남자에게 시집을 간다해도 간음이라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은 간음에 대한 것이나 이혼이나 결혼을 말하려는 게 아니고 결혼의 의무는 상대방이 살아 있을 때에 유효하다는 것이 포인트입니다. 마찬가지로 구원받기 전에 삶은 영적으로 율법과 결혼한 관계와 같은데 이 율법을 신랑으로 둔 상태는 즐겁고 행복한 결혼 상태가 아닙니다. 왜냐면 율법은 완전한 신랑입니다. 완전하기 때문에 완전한 아내만이 행복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 완전한 아내란 없습니다. 다 실수가 있고, 허물이 있으며, 죄가 있습니다. 그러니 매일 정죄만 당하고 삽니다. 여러분 격려 없고 매일 평가 당해서 0점 받고 사는 것 행복 할리 없습니다. 이 완전한 신랑은 수백 가지의 리스트를 가지고 매일 점검을 합니다. 이것은 이래서 안 되고, 저것은 저래서 틀려먹고, 도대체 너는 희망이 없군, 정죄를 당합니다. 그러므로 완전한 신랑인 율법과는 정말 지긋지긋한 결혼생활이 되는 것입니다.

이 율법은 우리를 돕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더 나은 크리스천이 되게 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율법은 단지 표준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부인이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떻게 하면 여기서 빠져 나올까 생각 하는 게 당연한 것이겠지요? 이 율법을 죽여 버릴까? 이혼을 할까? 자 그래서 죽었습니다. 누가 죽나요? 율법이 죽나요? 아니지요. 율법은 죽을 수 없습니다. 폐하지 않습니다. 영원합니다. 문제는 누가 죽었느냐 하는 것 입니다.

본문을 자세히 보면 죽은 것은 바로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죽은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죽고, 그분이 부활 하셨을 때에 우리는 새로운 결합을 이룸으로써 새신랑을 맞게 된 것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롬 7:4)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히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배운 6장에 우리가 거룩해 질수 있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바로 우리가 예수그리스도 안에 있기 때문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이 말은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심에 우리가 함께 동참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위치적인 진리입니다. Positional Truth.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에 대해서 죽은 자들이기 때문에 이제는 율법의 정죄도, 율법의 권세에서도 자유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한번 율법에 죽은 사람은 어떠한 영향도 그 사람에게는 행사 할 수 가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진리를 경험의 영역으로 만들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