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들처럼 죽겠다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 사람들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말을 자주 쓰는 사람들을 위한 글이 하나 있습니다. “정말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하루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말아 보세요. 그러면 배고파 죽고 그래도 죽지 않았다면 하루 동안 못 먹었던 음식을 쌓아 놓고 다 먹어 보세요. 그러면 배 터져 죽고, 그것도 안 되면 하루 동안 아무 일도 하지 말고 견뎌 보세요. 그러면 심심해 죽고 그것도 안 되면 자신을 힘들게 하는 일에 맞서서 두 배로 일해 보세요. 그러면 힘들어 죽고, 그것도 안 되면 1,000달러만 투자해서 즉석 복권을 사되 긁지 말고 바라만 보세요. 그러면 궁금해 죽고 그래서 그 복권들을 다 꺼내 놓고 긁었는데 다 꽝이면 반드시 열 받아 죽을 테니까요.” 세상에 웬 죽을 일이 그렇게도 많은지 그런 사람일수록 정말 죽을 일을 당해 보지 못한 사람들이리라 생각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죽음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율법으로 죽었다. 죄로부터 죽었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일점일획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죽지 않습니다. 죄는 엄청난 권세로 우리를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어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잘 죽지 않습니다.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금욕주의적으로 내 몸을 학대하고 몸부림 처도 소용없습니다. 루터는 죄로부터 이겨보려고 성 베드로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고 또 올라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죄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해 죽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이미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존재들이라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5장까지는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꾸준히 가르쳐왔습니다. 구원은 우리들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부자도 높은 사람도 오직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능력이 없는 것은 이 신비한 구원의 진리를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얻는다 하는데 까지는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이 하루 이틀 십년 이십년 예수를 믿어가다 보면 ‘성화’ 즉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공로를 쌓아가고, 우리가 선행을 쌓아가야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개념이 우리 인간들 안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경험은 진화론적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이 신비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6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축복이 무엇인가? 특권은 무엇이며 승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2가지를 깊이 있게 묵상하도록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신분인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신분을 묵상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나아가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를 깊이 있게 묵상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놓치게 되면 예수를 믿고서도 바리새인이 되어버립니다.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인으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신분, 영광스러운 어마어마한 그 신분을 망각해 버리면 방종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종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얼마나 어마 어마한 신분인지를 우리가 잊어버리면 행복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구원 얻은 나마저도 율법의 시각으로 나를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거룩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요. 어떤 때는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금방 절망과 좌절의 나락으로 빠져들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식을 보고, 내 부모를 보고, 내 배우자를 볼 때에도 율법의 눈으로 보면 단점만 보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비난합니다. 비판합니다. 관계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눈으로, 복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너를 보면 너도 나도 소중한 존재임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구원 받는다는 사실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단계는 바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단계인데 이것을 ‘칭의’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Justification)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과거입니다. 칭의 단계는 바로 죄의 값에서 자유롭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받은 구원이라고도 말합니다. 3장부터 5장 21절 까지 다룬 것이 이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께 용납 되어 질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성화라는 단계인데 이 단계는 바로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Penalty of Sin 이 '칭의'에서 처리 되었다면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이루어지는 단계가 바로 성화의 단계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현재의 상태이며 지금 우리가 지금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의 권세에서 이길 수 있는가?
세 번째 단계는 바로 영화의 단계인데 이것을 Glorification 이라 하고 이 단계에서는 바로 죄의 존재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의 존재가 없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 오늘 본문은 바로 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피눈물 나는 싸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죄와 사단을 향한 싸움입니다. 예수를 닮기 위한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승리 할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옛 본성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부적절한 Timing에 불쑥 튀어 나올 때 어떻게 그것을 처리하고 있습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처절한 싸움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든 인간은 죄성을 -Sin Nature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죄성은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욕망입니다. 이 죄성은 바로 아담으로부터 유전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죄성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 왕 노릇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옛 성품에서, 영향(Power)에서 우리가 벗어 날수가 있을까요?
문제는 나는 내 능력으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내 스스로의 결심과 훈련으로 이 싸움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한 패배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싸움에서 승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미 끝난 싸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배울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마 대다수의 크리스천은 이 싸움에서 이미 패배의식과 좌절과 낙담으로 싸울 능력을 상실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승리를 맛보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세 가지 사실과 세 가지 행동지침을 통해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죽었다는 것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죄로부터의 죽음이라는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율법으로 죽었다. 죄로부터 죽었다는 뜻이 무슨 뜻일까요?
율법은 죽지 않습니다. 일점일획도 상처를 입지 않습니다. 죄는 이 땅에 사는 동안 죽지 않습니다. 죄는 엄청난 권세로 우리를 쓰러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죄에 대해 죽어보려고 애를 써 보지만 잘 죽지 않습니다. 결심해도 소용없습니다. 금욕주의적으로 내 몸을 학대하고 몸부림 처도 소용없습니다. 루터는 죄로부터 이겨보려고 성 베드로 성당 계단을 무릎으로 오르고 또 올라서 피투성이가 되어서도 죄를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죄에 대해 죽으라고 가르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이미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이미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이미 죽은 존재들이라고 본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5장까지는 왜 구원 받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어떻게 구원을 받아야 하는가에 대해서 꾸준히 가르쳐왔습니다. 구원은 우리들의 선행이나 노력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구원은 오직 믿음으로만 얻어지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가 됩니다. 여기는 예외가 없습니다. 잘난 사람도 똑똑한 사람도 부자도 높은 사람도 오직 믿음으로만, 은혜로만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았지만 능력이 없는 것은 이 신비한 구원의 진리를 오해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구원을 믿음으로 얻는다 하는데 까지는 이해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자신들이 하루 이틀 십년 이십년 예수를 믿어가다 보면 ‘성화’ 즉 우리 자신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노력으로, 우리가 공로를 쌓아가고, 우리가 선행을 쌓아가야 되는 것이라고 착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개념이 우리 인간들 안에는 없습니다.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는 모든 경험은 진화론적입니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오직 은혜(Sola Gratia), 오직 믿음(Sola Fide) 이 신비를 깨달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6장부터 8장까지는 구원 얻은 성도들의 축복이 무엇인가? 특권은 무엇이며 승리는 무엇인가? 하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로마서는 우리에게 2가지를 깊이 있게 묵상하도록 지속적으로 요청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내가 예수를 믿었다는 것이 얼마나 어마어마한 신분인가? 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굉장한 것인가? 내가 하나님의 가족이 되었다는 것이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신분을 묵상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나아가서 율법으로부터의 자유, 죄로부터의 자유를 깊이 있게 묵상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놓치게 되면 예수를 믿고서도 바리새인이 되어버립니다. 종교인으로 전락해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인본주의 신앙인으로 타락하고 마는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새로운 신분, 영광스러운 어마어마한 그 신분을 망각해 버리면 방종 하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으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종교로부터 해방시키기 위해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구원받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존재인지, 얼마나 어마 어마한 신분인지를 우리가 잊어버리면 행복이 깨져버리고 맙니다. 구원 얻은 나마저도 율법의 시각으로 나를 보면 비참하기 짝이 없습니다. 어떤 때는 거룩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한 모습을 드러내게 되지요. 어떤 때는 영광스런 승리를 쟁취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금방 절망과 좌절의 나락으로 빠져들곤 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볼 때도 그렇습니다. 내가 내 자식을 보고, 내 부모를 보고, 내 배우자를 볼 때에도 율법의 눈으로 보면 단점만 보입니다. 그래서 함부로 비난합니다. 비판합니다. 관계가 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은혜의 눈으로, 복음의 눈으로, 예수님의 시각으로, 하나님의 관점으로 나를 보고 너를 보면 너도 나도 소중한 존재임을 우리가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에는 이 구원 받는다는 사실에는 세 가지 단계가 있는 것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과거에 가졌던 단계는 바로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는 단계인데 이것을 ‘칭의’의 단계라고 말합니다. (Justification) 이것은 말 그대로 우리의 과거입니다. 칭의 단계는 바로 죄의 값에서 자유롭게 된 것을 말합니다. 이것을 다른 말로는 받은 구원이라고도 말합니다. 3장부터 5장 21절 까지 다룬 것이 이 문제였습니다.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가? 어떻게 하나님께 용납 되어 질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 대한 답을 우리는 이미 공부를 했습니다.
두 번째 단계는 바로 성화라는 단계인데 이 단계는 바로 죄의 능력으로부터 자유롭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Penalty of Sin 이 '칭의'에서 처리 되었다면 죄의 능력으로부터의 자유가 이루어지는 단계가 바로 성화의 단계인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우리의 현재의 상태이며 지금 우리가 지금 엎치락뒤치락 싸우고 있는 현실인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이 죄의 권세에서 이길 수 있는가?
세 번째 단계는 바로 영화의 단계인데 이것을 Glorification 이라 하고 이 단계에서는 바로 죄의 존재로부터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즉 죄의 존재가 없어지는 상태를 말합니다. 자 오늘 본문은 바로 이 거룩한 삶을 살기 위한 우리의 피눈물 나는 싸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과 죄와 사단을 향한 싸움입니다. 예수를 닮기 위한 고통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죄악의 유혹으로부터 승리 할 수가 있는가에 대해서 말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이 싸움을 싸우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여러분의 옛 본성이 생각지도 않은 때에, 부적절한 Timing에 불쑥 튀어 나올 때 어떻게 그것을 처리하고 있습니까? 쉽지가 않습니다. 처절한 싸움입니다.
지난 시간에 우리는 모든 인간은 죄성을 -Sin Nature를 가지고 있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심지어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아이들까지도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죄성은 육신의 소욕을 따라서 살려고 하는 경향입니다. 욕망입니다. 이 죄성은 바로 아담으로부터 유전 되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이 죄성은 할 수만 있다면 우리의 삶에 왕 노릇 하려고 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강한지 여기서 벗어나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이 옛 성품에서, 영향(Power)에서 우리가 벗어 날수가 있을까요?
문제는 나는 내 능력으로는 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실패의 원인이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능력으로 내 스스로의 결심과 훈련으로 이 싸움을 이기려고 합니다. 그러나 결과는 비참한 패배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사실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 싸움에서 승리를 하셨다는 것입니다.
이 싸움은 이미 끝난 싸움입니다. 주님께서는 이 승리를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 승리는 은혜입니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배울 말씀이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아직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아마 대다수의 크리스천은 이 싸움에서 이미 패배의식과 좌절과 낙담으로 싸울 능력을 상실해 있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승리를 맛보는 크리스천이 되기를 간절히 소원 합니다. 바울이 오늘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세 가지 사실과 세 가지 행동지침을 통해서 승리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간절히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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