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트 워싱턴에 위치한 할렐루야 뉴욕교회(담임 이광희 목사)는 지난달 유럽에 다녀왔다. 초기 기독교 역사를 곳곳에서 접할 수 있는 유럽에서 보고 느끼고 쓴 것을 기고했다.
나는 1974년도 留學(유학)의 靑雲(청운)의 꿈을 품고, 유럽(불란서)에 첫 발을 내딛었고(이광희 목사), 아내(이미선 목사)는 就業(취업)을 위하여 1970년도 유럽(독일)에 到着(도착)했었다. 歲月(세월)이 流水유수)와 같이 흘러 어언 40년(36년, 39년)의 歲月(세월)이 흘러 60세 環甲(환갑) 祈念旅行(기념여행)으로 유럽에 다시 到着(도착)하니, “우리의 年壽(년수)가 七十(칠십)이요 康健(강건)하면 八十(팔십)이라도 그 年壽(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 모세의 人生無常(인생무상)의 노래가 生覺(생각)난다.
14일간 (8월 2일-15일)의 여정(이태리, 폴랜드, 체코, 독일)은 믿음의 삶과 죽음, 藝術(예술)과 休息(휴식), 國家(국가)와 善惡(선악), 自由와 生命(생명)을 主題(주제)로 한 旅行(여행)이었다.
첫번째 行先地(행선지)인 이태리 로마에서의 5일 旅程(여정)중, 첫번째의 訪問地(방문지)는, 두손을 뒤로 묶인채 돌계단을 기어올라 斬首(참수) 당했던 사도바울의 참수대를 시작으로 로마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도바울의 초상화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訃音(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6-7)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고, 사도바울의 참수되는 장면을 돌로 조각해 놓은 像(상)이 세워져 있었다.
인생의 삶에는 2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첫째는 소유형(To have) 의 인생, 즉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갖었느냐? 에 삶의 초점을 맞추는 삶이요, 둘째는 존재형(To be)로 사는 삶이다. 나의 存在(존재)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하여 나의 삶을 불태울 것인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갈 것인가? 계속적인 나 自身(자신)의 存在價値(존재가치)를 물으며 사는 삶이다.
세례요한은
“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石淸(석청)을 먹으며, (막 1:6)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 1:20)
“…나는 물로 너희에게 洗禮(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能力(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눅 3:16),
“그는 興(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 3:30)
개인 소유가 없어도, 자신의 존재 目的(목적)과 使命(사명)(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을 분명히 알았고, 종래는 ‘목 베임으로 삶을 마감 ’ 하였지만, -
-“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헤롯이 …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마 14:8-12)-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마 11:11) 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소유형의 인생들을 향하여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은 3가지에 붙잡혀 살았던 사람이었다.
첫째는 말씀에 붙잡혀 살았고(행18:5),
둘째는 성령에 붙잡혀 살았고(행16:6-10)
셋째는 사명에 붙잡혀 살았다(행20:24) <使命(사명)은 일하기 위하여 붙어있는 목숨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갈길을 후회없이 달려갔던 존재형의 사명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확신에 차 있었는데,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8)
고백했던 것이다.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얼마를 所有(소유) 했는냐? 안 했느냐? 에 喜悲哀樂(희비애락)을 거는 소유형 인생이 아니라 세례요한 처럼, 사도바울 처럼, 나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하여 남은 삶을 후회없이 불태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사는 존재형의 삶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두번째의 방문지는 기독교인들을 수없이 죽었던 대전차 경기장과 콜로세움과 공동묘지 카타콤 이었다.
基督敎(기독교)의 根本眞理(근본진리)는 救贖(구속) 곧 罪사함과 復活(부활)이다. 아무리 現代科學(현대과학)이 發展(발전)되어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죄의 문제요, 또 하나는 죽음의 문제이다.
宇宙競爭(우주경쟁) 時代(시대)가 돌입하면서,-未來(미래)의人間(인간)生活相(생활상)을 제시하기를 – 앞으로는 달이나 화성으로 移住(이주)하여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可能(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설령, 달이나 화성으로 이주하여 산다 하여도 인간의 죄의 문제는 해결 할 수 없어서 달이나 화성에서도 죄책감에 시달려야하며, 또한 죄인들을 위한 刑務所(형무소)를 建設(건설)해야 하고, 때가 되면 죽어야 하며, 共同墓地(공동묘지)가 세워질 것이다.
인간의 힘이나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이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永遠(영원)한 기업을 예수님이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스라엘로 悔改(회개)케 하사 罪(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모든 사람이 罪(죄)를 犯(범)하였으매 하나님의 榮光(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救贖(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恩惠(은혜)로 값없이 義(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3-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1:22)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고전 15:12)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신앙생활의- 요동치 않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體驗信仰(체험신앙)이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져보았고, 대면했던 제자들의 삶은, 180도로 바뀌게 되었다.
‘소극적인 삶에서 적극적인 삶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잠시있는 이세상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오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는 -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6)
욥의 신앙고백처럼 내세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으며, 부활의 산소망이 있을찐데,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펄펄끓는 기름가마에 던져짐과, 사자의 밥이되며,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는 화형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며, 무인도로 유배 당함과,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e)에서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생활을 감수하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면서도, 배교를 통한, 구차히 삶을 연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걸핏하면 시험 들었다고 하며, 교회를 들숙 날숙하며, 이 교회 저 교회 수평 이동하며 문제만을 일으키는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전차 경기장, 콜로세움, 카타콤등의 유적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피 흘림을 통하여 전달해준 信仰(신앙)의 信實(신실)한 참모습들을 거울로 비춰주면서, 말없는 산 證人(증인)으로서 證據(증거)하고 있었다.
세번째의 방문지는 베드로의 再獻身(재헌신)이 이뤄졌던 ‘도미네 쿼 바디스’, 베드로광장. 대성당과 바티칸 이었다.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중 네로의 핍박이 닦아오자 안개 낀 이른 새벽,
로마 성을 빠져 나가기 위하여 도망치고 있을 때, 부활의 예수님이 환상 가운데 로마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에 베드로가 “도미네 쿼 바디스” <주여, 어데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버리고 가는 나의 羊(양) 무리를 위하여 다시 十字架(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이 로마 성으로 들어 오고 있노라!!”
베드로는 크게 깨닫고, 도망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의 성으로 되 돌아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殉敎(순교)했다.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느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8-19>
서기 67년경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때 꺼구로 못박혀 죽음을 당하고, 바티칸 언덕에 묻혔다. 베드로가 순교한 지 약 250년이 지난 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베드로가 묻혀있는 곳으로 믿어지는 자리 위에 성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1506년 율리우스2세는 낡은 성당을 헐고 그리스도교의 수도로서의 로마를 상징할 만한 웅장한 대성당을 브라만테로 하여금 계획하게 하여 신축공사를 시작하지만 교황과 브라만테가 사망하는 바람에 대성당의 건축이 여러 건축가의 손을 거치게 되다가 파올로 3세가 미켈란젤로에게 넘기니 기존의 설계를 대폭 수정하여 베드로의 묘소 위에 (실제로 베드로가 묻혀 있었는지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었는데 20세기에 들어서 베드로의 묘소임을 확인하고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는 전세계에 공표함) 마치 왕관을 씌운 듯한 느낌을 주는 우아하고 거대한 쿠폴라를 받치는 부분이 완성되는 것만 보고 1564년에 사망하고 만다. 이어 교황 식스투스 5세때 45층짜리 빌딩의 높이와 맞먹는 쿠폴라를 1590년 완성한다.
그 후 대성당 공사는 주로 성당의 내부 장식에 집중되었고, 교황 파올로 5세 때 건축가 마데르노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변경 시켜 6만명이 수용될 수 있는 세로축이 가로축보다 더 긴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바뀐다. 1624년 교황 우르바노 8세 때 25세의 나폴리 출신 베르니니는 중앙 제단을 덮는 청동 발다키노를 9년에 걸쳐 완성한다. 결국 베드로 성당은 1629년 120년 정도의 세월을 머금고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다.
대성당 건축공사 중 로마시민들이 관심을 가졌던 일은 높이 25m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900명의 인원과 140마리의 말, 44마리 노새를 동원해 베드로성당 앞의 광장으로 옮겼다>
유럽의 모든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를 History 라고한다. 이를 그대로 서술하면 His Story 로서 예수님의 이야기 라는 뜻이다. 史家(사가)들은 歷史(역사)를 기술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中心(중심)에 두었고, 예수 전 시대를 B.C., (주님 오시기 이전 시대) 예수 이후의 시대를 A.D.< 라틴어 Anno Domine>-(영역 In the year our Lord)-<우리 주님의 시대> 로 표기했다.
B.C., A.D. 의 서술방법은 역사적인 思考(사고)뿐 아니라, 내 삶에 B.C.,A.D. 의 역사가 敍述(서술)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 오시기 전의 나의 삶과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이후의 삶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기전과 후의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를
“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3-14) 고백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관은 단 두개인데,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셨다.
천국을 따고 들어 갈 수 있는 천국열쇠를 위임 받은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4),
-‘화평함과 거룩함’ (히 12:14), 의 주님의 소원을 내적으로 이루어 드리며,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의 외적사명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계속
나는 1974년도 留學(유학)의 靑雲(청운)의 꿈을 품고, 유럽(불란서)에 첫 발을 내딛었고(이광희 목사), 아내(이미선 목사)는 就業(취업)을 위하여 1970년도 유럽(독일)에 到着(도착)했었다. 歲月(세월)이 流水유수)와 같이 흘러 어언 40년(36년, 39년)의 歲月(세월)이 흘러 60세 環甲(환갑) 祈念旅行(기념여행)으로 유럽에 다시 到着(도착)하니, “우리의 年壽(년수)가 七十(칠십)이요 康健(강건)하면 八十(팔십)이라도 그 年壽(년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시 90:10) - 모세의 人生無常(인생무상)의 노래가 生覺(생각)난다.
14일간 (8월 2일-15일)의 여정(이태리, 폴랜드, 체코, 독일)은 믿음의 삶과 죽음, 藝術(예술)과 休息(휴식), 國家(국가)와 善惡(선악), 自由와 生命(생명)을 主題(주제)로 한 旅行(여행)이었다.
첫번째 行先地(행선지)인 이태리 로마에서의 5일 旅程(여정)중, 첫번째의 訪問地(방문지)는, 두손을 뒤로 묶인채 돌계단을 기어올라 斬首(참수) 당했던 사도바울의 참수대를 시작으로 로마의 여행이 시작되었다.
사도바울의 초상화에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訃音(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딤후4:6-7)의 말씀이 새겨져 있었고, 사도바울의 참수되는 장면을 돌로 조각해 놓은 像(상)이 세워져 있었다.
▲사도바울의 초상화 앞에 선 이미선 목사 | |
인생의 삶에는 2종류의 형태가 있는데, 첫째는 소유형(To have) 의 인생, 즉 얼마나 소유했느냐? 얼마나 갖었느냐? 에 삶의 초점을 맞추는 삶이요, 둘째는 존재형(To be)로 사는 삶이다. 나의 存在(존재)가 무엇이며, 무엇을 위하여 나의 삶을 불태울 것인가?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갈 것인가? 계속적인 나 自身(자신)의 存在價値(존재가치)를 물으며 사는 삶이다.
세례요한은
“ 약대털을 입고 허리에 가죽띠를 띠고 메뚜기와 石淸(석청)을 먹으며, (막 1:6)
“…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요 1:20)
“…나는 물로 너희에게 洗禮(세례)를 주거니와 나보다 能力(능력)이 많으신 이가 오시나니 나는 그 신들메를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눅 3:16),
“그는 興(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 “(요 3:30)
개인 소유가 없어도, 자신의 존재 目的(목적)과 使命(사명)(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을 분명히 알았고, 종래는 ‘목 베임으로 삶을 마감 ’ 하였지만, -
-“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헤롯이 …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마 14:8-12)-
세례요한은 “…여자가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 (마 11:11) 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예수님은 소유형의 인생들을 향하여
“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말씀하셨다.
▲사도바울의 참수되는 장면을 돌로 조각해 놓은 像(상) | |
사도바울은 3가지에 붙잡혀 살았던 사람이었다.
첫째는 말씀에 붙잡혀 살았고(행18:5),
둘째는 성령에 붙잡혀 살았고(행16:6-10)
셋째는 사명에 붙잡혀 살았다(행20:24) <使命(사명)은 일하기 위하여 붙어있는 목숨을 말한다.>
사도바울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자기의 갈길을 후회없이 달려갔던 존재형의 사명자였다.
그러기에 그는 확신에 차 있었는데,
“ 나의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 증거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행 20:24)
“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딤후 4: 8)
고백했던 것이다.
한번 왔다 가는 인생, 얼마를 所有(소유) 했는냐? 안 했느냐? 에 喜悲哀樂(희비애락)을 거는 소유형 인생이 아니라 세례요한 처럼, 사도바울 처럼, 나의 존재 목적이 무엇이며, 무엇을 위하여 남은 삶을 후회없이 불태울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으며 사는 존재형의 삶이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두번째의 방문지는 기독교인들을 수없이 죽었던 대전차 경기장과 콜로세움과 공동묘지 카타콤 이었다.
▲대전차 경기장, 콜로세움 앞에서 | |
基督敎(기독교)의 根本眞理(근본진리)는 救贖(구속) 곧 罪사함과 復活(부활)이다. 아무리 現代科學(현대과학)이 發展(발전)되어도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없는 두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죄의 문제요, 또 하나는 죽음의 문제이다.
宇宙競爭(우주경쟁) 時代(시대)가 돌입하면서,-未來(미래)의人間(인간)生活相(생활상)을 제시하기를 – 앞으로는 달이나 화성으로 移住(이주)하여 사람들이 살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可能(가능)한 말이다. 그러나 설령, 달이나 화성으로 이주하여 산다 하여도 인간의 죄의 문제는 해결 할 수 없어서 달이나 화성에서도 죄책감에 시달려야하며, 또한 죄인들을 위한 刑務所(형무소)를 建設(건설)해야 하고, 때가 되면 죽어야 하며, 共同墓地(공동묘지)가 세워질 것이다.
인간의 힘이나 과학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죄의 문제, 죽음의 문제, 이세상뿐 아니라 오는 세상에 永遠(영원)한 기업을 예수님이 길을 열어 놓으셨다.
“이스라엘로 悔改(회개)케 하사 罪(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예수)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행 5:31)
“모든 사람이 罪(죄)를 犯(범)하였으매 하나님의 榮光(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救贖(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恩惠(은혜)로 값없이 義(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3-24)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롬 8:1-2)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예수)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받았으니 (엡 1:7)
“항상 우리와 함께 다니던 사람 중에 하나를 세워 우리로 더불어
예수의 부활하심을 증거할 사람이 되게하여야 하리라 하거늘 (행 1:22)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1:4)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 (고전 15:12)
“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10-11)
신앙생활의- 요동치 않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體驗信仰(체험신앙)이다.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져보았고, 대면했던 제자들의 삶은, 180도로 바뀌게 되었다.
‘소극적인 삶에서 적극적인 삶으로, 두려움에서 담대함으로,
잠시있는 이세상뿐 아니라 죽음 이후에 오는 영원한 세상을 바라보는 -
“나의 이 가죽,이것이 썩은 후에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욥 19:26)
욥의 신앙고백처럼 내세를 바라보는 눈이 생겼으며, 부활의 산소망이 있을찐데, 희롱과 채찍질,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펄펄끓는 기름가마에 던져짐과, 사자의 밥이되며, 불에 태워 죽임을 당하는 화형과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으며, 무인도로 유배 당함과, 공동묘지인 카타콤(Catacombe)에서의 요람에서 무덤까지의 생활을 감수하며,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면서도, 배교를 통한, 구차히 삶을 연장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걸핏하면 시험 들었다고 하며, 교회를 들숙 날숙하며, 이 교회 저 교회 수평 이동하며 문제만을 일으키는 오늘날 교인들의 신앙생활에, 대전차 경기장, 콜로세움, 카타콤등의 유적들은 믿음의 선진들이 피 흘림을 통하여 전달해준 信仰(신앙)의 信實(신실)한 참모습들을 거울로 비춰주면서, 말없는 산 證人(증인)으로서 證據(증거)하고 있었다.
세번째의 방문지는 베드로의 再獻身(재헌신)이 이뤄졌던 ‘도미네 쿼 바디스’, 베드로광장. 대성당과 바티칸 이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만난 '도미네 쿼 바디스' | |
베드로가 로마에서 복음을 증거하는 중 네로의 핍박이 닦아오자 안개 낀 이른 새벽,
로마 성을 빠져 나가기 위하여 도망치고 있을 때, 부활의 예수님이 환상 가운데 로마 성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이때에 베드로가 “도미네 쿼 바디스” <주여, 어데로 가시나이까?> 예수께서 베드로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버리고 가는 나의 羊(양) 무리를 위하여 다시 十字架(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이 로마 성으로 들어 오고 있노라!!”
베드로는 크게 깨닫고, 도망가던 발걸음을 돌이켜 로마의 성으로 되 돌아와서 복음을 증거하다가 붙잡혀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殉敎(순교)했다.
▲베드로 광장, 베드로성당, 및 바실리카(Basilica)바티칸 부속 건물은 열쇠 모양의 건물로 설계되어 지어진 예술품이다. <마 16:19-19 - “…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 | |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느리라. 내가 천국의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 <마16:18-19>
▲성 베드로 성당-바티칸 시국의 상징인 성 베드로 성당은 베드로 의 묘 위에 세워져 있다.(건립을 위해 막대한 비용의 면죄부를 팔음으로서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어 결국 신교와 구교가 갈라졌던 성 베드로 성당) | |
서기 67년경 베드로는 네로 황제가 그리스도교 신자들을 무자비하게 탄압할 때 꺼구로 못박혀 죽음을 당하고, 바티칸 언덕에 묻혔다. 베드로가 순교한 지 약 250년이 지난 후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 때 베드로가 묻혀있는 곳으로 믿어지는 자리 위에 성베드로 대성당이 세워졌다.
1506년 율리우스2세는 낡은 성당을 헐고 그리스도교의 수도로서의 로마를 상징할 만한 웅장한 대성당을 브라만테로 하여금 계획하게 하여 신축공사를 시작하지만 교황과 브라만테가 사망하는 바람에 대성당의 건축이 여러 건축가의 손을 거치게 되다가 파올로 3세가 미켈란젤로에게 넘기니 기존의 설계를 대폭 수정하여 베드로의 묘소 위에 (실제로 베드로가 묻혀 있었는지는 아무도 단정할 수 없었는데 20세기에 들어서 베드로의 묘소임을 확인하고 1950년 교황 피우스 12세는 전세계에 공표함) 마치 왕관을 씌운 듯한 느낌을 주는 우아하고 거대한 쿠폴라를 받치는 부분이 완성되는 것만 보고 1564년에 사망하고 만다. 이어 교황 식스투스 5세때 45층짜리 빌딩의 높이와 맞먹는 쿠폴라를 1590년 완성한다.
그 후 대성당 공사는 주로 성당의 내부 장식에 집중되었고, 교황 파올로 5세 때 건축가 마데르노는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변경 시켜 6만명이 수용될 수 있는 세로축이 가로축보다 더 긴 라틴 십자형 평면으로 바뀐다. 1624년 교황 우르바노 8세 때 25세의 나폴리 출신 베르니니는 중앙 제단을 덮는 청동 발다키노를 9년에 걸쳐 완성한다. 결국 베드로 성당은 1629년 120년 정도의 세월을 머금고 마침내 완성되는 것이다.
대성당 건축공사 중 로마시민들이 관심을 가졌던 일은 높이 25m의 이집트의 오벨리스크를 900명의 인원과 140마리의 말, 44마리 노새를 동원해 베드로성당 앞의 광장으로 옮겼다>
▲성베드로 성당 | |
▲성베드로 성당. 벽면에 써있는 알파벳 글씨 한자의 길이가 2m 이다 | |
▲바티칸 내부로 들어서면서 오른쪽 벽에 유리벽의 보호 덮게에 둘러 싸여있는 미켈란젤로가 25세에 대리석으로 조각한 세기의 걸작 피에타 상(1499년-1500년)이 보존되어 있다 | |
유럽의 모든 정치, 문화, 예술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에 촛점을 맞추고 있다.
역사를 History 라고한다. 이를 그대로 서술하면 His Story 로서 예수님의 이야기 라는 뜻이다. 史家(사가)들은 歷史(역사)를 기술할 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역사의 中心(중심)에 두었고, 예수 전 시대를 B.C.
B.C., A.D. 의 서술방법은 역사적인 思考(사고)뿐 아니라, 내 삶에 B.C.,A.D. 의 역사가 敍述(서술) 되어야 한다. 즉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 오시기 전의 나의 삶과 예수님이 내 안에 들어오신 이후의 삶이 명확하게 구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예수 믿기전과 후의 자신의 삶을 명확하게 구분하기를
“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딤전 1:13-14) 고백했다.
이 세상에 수많은 기관들이 있지만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기관은 단 두개인데, 하나는 가정이요, 또 하나는 교회이다.
예수님께서 교회에 천국 열쇠를 맡기셨다.
천국을 따고 들어 갈 수 있는 천국열쇠를 위임 받은 교회는-
-‘세상의 소금과 빛’ (마 5:13-14),
-‘화평함과 거룩함’ (히 12:14), 의 주님의 소원을 내적으로 이루어 드리며,
성령의 권능을 받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예수님의 증인의 외적사명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행 1:8)- 을 감당해야 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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