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태어나자 마자 선행과 상벌을 연결시켜 교육받는다. 부모 조차 자녀들을 행동으로 판단한다. 잘하면 머리를 쓰다듬고 못하면 벌을 준다. 좋은 사람인지 나쁜 사람인지 평가는 주로 행동으로 결정된다. 이 영향으로 우리에겐 하나님 앞에서도 행위를 통해 인정받으려는 마음이 들어있다.

기독교외에 거의 모든 종교들은 선행의 공로나 자력을 통해 구원에 이르려고 노력한다. 카톨릭교회는 공로가 구원에 큰 기여를 한다고 가르친다. 유대교는 율법을 준수하는 도덕적인 삶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고 애쓴다. 불교는 자력으로 해탈 즉 구원에 이르려고 수도와 참선에 힘쓴다. 인도의 종교 역시 고행과 금욕을 강조한다. 과연 인간은 선행을 통해 자력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가?

성경은 인간이 행위로는 하나님께 의롭다함을 얻을 수 없다고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보시기에 인간은 이미 죄인이고 죄 가운데 살고 있기 때문이다(롬1:19-23). 뉴스 매체엔 매일같이 살인, 사기, 간통, 폭력, 불법, 뇌물, 동성애, 방탕한 생활에 빠진 사람들의 이야기가 터져 나온다. 도덕성과 청렴성을 강조하던 사람들이 부정한 돈에 연루되어 지탄의 대상이 된다. 사제나 목사가 동성애로 세상을 시끄럽게 할 때도 있다. 속을 다 알기 전까진 의인이었던 사람들인데 알고 보니 죄인이었다.

죄인이기 때문에 악행을 저지른다는 게 성경적 관점이다. 인간의 부도덕한 행위들은 사과 나무의 사과 열매와 같은 것이다. 사과나무기 때문에 사과 열매가 맺힌 것이다. 사람들은 열매를 보고 나무를 알아본다. 최근 아이오와주는 동성결혼을 합법화해 논란이 되고 있다. 전통적인 성경해석은 동성애를 타락한 인간의 모습 중 하나로 본다. 동성애는 남자든 여자든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동성끼리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 듯 하는” 부끄러운 짓이다(롬1:26-27). 동성애의 합법성을 주장하는 사람 중에는 그런 성향을 가지고 태어나 본인도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다수의 동성애자들은 문란한 성문화 속에 자신들의 선택으로 된 것이다 .

하나님 보시기에 인간의 선행은 범법자의 자선행위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자선 남비에 100불을 넣는 선행으로 은행강도가 의인이 될 수 있는가. 불타는 집에서 어린이를 구했다고 살인자에게 용감한 시민상을 줄 수 있는가. 창조주를 부인하는 사람들의 선행이 하나님 보시기에 이와 같다. 이것은 부모와 자녀의 비유를 통해 더 잘 이해될 수 있다. 자신을 낳아 길러준 부모의 은혜를 모르는 불효자식이 세상에 나가 자선활동을 한다고 효자로 바뀌겠는가. 사람들 눈에 의인으로 보여도 불효자식일 뿐이다.

기독교는 선행을 무시하지 않는다. 예수님은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마5:16) 말씀하셨다. 베드로 사도는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 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말했다(벧전2;12). 바울사도는 디모데에게 “선한 일을 행하고 선한 사업에 부하고 나눠주기를 좋아하며 동정하는 자가 되게 하라”(딤전6:18)고 당부했다. 기독교가 선행을 강조하는 것은 구원얻는 공로를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려는 것이다. 세상은 겉으로 들어난 행동과 결과에 주목한다. 선교적 차원에서 우리는 복음을 증거하는 일과 함께 고아원 운영, 양로원 후원, 도시 빈민자 후원, 외국 노동자의 인권보호활동, 실직자들의 식사제공, 등과 같은 자선활동에 적극 참여할 필요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런 선행을 보고 하나님께 돌아오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