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기독교에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바로 비젼(Vision)이라는 단어입니다. 우리 말로 꿈이라는 표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비젼이라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하는 이유는 아마도 외래어가 주는 특별한 느낌을 더 선호하는 시대적 흐름 때문인 것 같습니다. 또 한가지 이유는 우리 말의 꿈은, 동일어로서의 포괄적 다른 의미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혼동을 피하기 위하여 비젼이라는 말을 사용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젼은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이 비젼이란 말이 기독교 안에서 사용될 때에는 신중을 기해야합니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다가는 자기 스스로 만든 비젼을 마치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으로 혼동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에서 비젼을 말할 때의 그 비젼은 나의 비젼이 아니라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젼이라야 합니다. 나의 비젼과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 사이에는 무슨 차이가 있습니까? 나의 비젼은 대체로 결과가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성공으로 끝나야 한다는 전제가 내포된 경우가 많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불이익이 돌아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을 남들 앞에 비젼이라고 당당하게 제시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그런 것은 비젼이라고 부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내게 주신 비젼은 세상이 인정하는 성공을 포함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가졌다는 이유만으로 내게 어려움과 역경이 닥칠 수 있는 것이 바로 기독교가 말하는 비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을 가졌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요셉입니다.

요셉의 경우 결과만 보고 평가하면 그가 결국에는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으니 요셉의 비젼이 세상적으로 성공한 결과를 가져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의 삶 자체를 자세히 살펴보면 그리 간단하게 단정을 지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비젼(꿈)이 있었습니다. 자기 부모와 형제들 모두가 자신에게 절하는 비젼(꿈)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처음 요셉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젼을 가슴에 품었을 때 그의 비젼으로 인해 자신에게 닥칠 엄청난 비극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요셉은 하나님이 주신 비젼을 가졌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기 형들의 손에 죽을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만약 내게 주어진 비젼 때문에 내 형제들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면 과연 그것을 나의 비젼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요셉의 시련은 거기서 끝나지 않고 이집트의 노예로 팔려가게 됩니다. 만약 내가 가진 비젼이 나를 자유인이 아니라 노예처럼 살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과연 나의 비젼이라고 자신있게 말 할 수 있습니까? 노예로 살던 요셉은 그래도 굴하지 않고 충성되게 주인을 섬기다가 마침내 주인이 신뢰하는 노예가 됩니다. 이제 살만하다고 여길 때 주인의 아내의 유혹을 거절함으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고 지하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만약 나의 비젼이 나로 하여금 억울한 감옥살이를 하게 만들어도 그것을 나의 비젼이라고 끝까지 붙들 수 있을까요? 하지만 요셉은 지하 감옥에서 이집트 왕 바로의 신하의 꿈을 제대로 해석해주고 마침내 이집트의 총리가 됩니다. 그가 가진 비젼(꿈)의 일부가 이루어졌지요! 그런 후에 형들이 흉년을 피해 곡식을 사러 이집트에 왔다가 요셉에게 도움을 청하게 됩니다. 드디어 요셉의 비젼이 이루어지는 순간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자기에게 절하는 형들에게 자기의 비젼이 이루어졌다고 자랑하며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요셉의 식구들을 구하기 위해 자기를 미리 이집트에 보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 말은 결국 자기에게 주어진 비젼은 자신의 영화를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것이었다는 고백의 말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비젼의 대표적인 실례입니다.

성경은 내가 존재하는 목적은 나의 비젼(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젼(꿈)을 이루는 것이라고 분명히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나의 존재 이유는 이 땅에서 내 이름을 내는 것이 아니라 나를 통해 내가 믿는 하나님의 이름을 드러내기 위함입니다. 하나님의 비젼이 나를 통해 드러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나 자신을 부인하는 희생이 요구됩니다. 하나님의 비젼 앞에 나의 욕심과 야망을 내려 놓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비젼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필요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고, 무명해질 각오를 해야하고, 심지어 죽음의 길이라도 걸어가야만 합니다. 이런 자기 부인과 자기 희생이 있어야만 비로서 하나님의 비젼(꿈)이 나를 통해 이 땅에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불행하게도 요즈음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것은 비젼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행여나 하나님으로부터 이런 비젼을 받을까 두려워합니다. 대신에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 자기 스스로 만든 비젼을 이루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습니다. 자기 스스로 만든 비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하나님의 비젼처럼 보이기 위해 포장하고 각색하는데 온갖 노력을 아끼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기 비젼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는 일을 서슴치 않고 하게 됩니다.

지금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는 스스로가 움켜잡고 있는 비젼을 돌이켜 보는 것입니다. 내가 추구하는 비젼이 과연 하나님이 주신 것인지, 아니면 내가 나를 위해 만든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포장하고 있는지를 냉정하게 살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내가 만든 비젼은 과감하게 내려 놓고,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비젼은 그 어떤 것이든지 확고하게 붙들어야 합니다. 내 비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비젼을 내 안에 품을 때 비로서 나를 통해 하나님의 하나님 되심이 세상 가운데 드러나는 역사가 일어납니다. 지금은 내가 원하는 비젼이 아니라 나를 향한 하나님의 비젼을 발견하고 그 비젼을 이루기 위해 내 삶을 드릴 때입니다. 지금은 자기 비젼을 이루기 위해 넓은 문으로 걸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비젼을 이루기 위해 뒤돌아보지 않고 좁은 문을 향해 걸어가는 그리스도인들이 하나 둘 세상 앞에 모습을 나타내 보여야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