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서 사용되는 꽃들이 여러 가지 있겠습니다만 그 중에 백합만큼 많이 사용되는 경우도 흔치 않습니다. 이런 영광스러운 일들을 감당하는 백합꽃에게도 아픔이 있습니다. 평생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살아 간다는 것입니다. 무심히 ‘이쁘다’라고 지나가면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가만히 꽃을 살펴보면 항상 90도로 꺽여 있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제가 들은 백합이 고개 숙인 이유는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인류의 죄를 위해 십자가를 지실 때 세상 만물이 그 앞에 슬퍼하며 고개를 숙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백합만큼은 도도하게 고개를 숙이지 않고 자기의 아름다움을 자랑했다고 합니다. 결국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찾아 오셨을 때 너무 너무 부끄럽고 죄스러워 고개를 들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사죄하는 마음으로 평생을 고개를 숙이고 겸손히 살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할 만한 이야기 같지만 주님의 고난과 부활을 날마다 생각하며 살아가야 할 성도로서 한 번쯤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이야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지난 주간에는 고난 주간을 보냈습니다. 참 백함처럼 부끄러운 한 주였습니다. 어느새인가 신앙 생활의 매너리즘에 젖어버린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매년 돌아오는 고난 주간으로 스치고 지나가 버릴 뻔 했습니다. 지난 주 설교 중에 오는 주가 고난 주간이라고 말했더니 딸 아이가 ‘그럼 나 금식해야지’라고 말했다고 하는 이야기를 전했습니다. 의미도 모른 체 고난 주간이라니 금식한다고 ‘내일도 하고 금요일도 해야지’라고 하는 딸아이에게 그냥 그렇게 장난치듯 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무라고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정말 이 아이가 하루 종일 좋아하는 음식을 먹지 않고 굶는 것입니다. 그리고 책상에 앉아 공부만 하는 것입니다. 금요일 저녁 예배를 간 교회에서도 음식을 내 놓고 유혹했습니다. ‘그냥 먹어도 돼’, 그래도 이 아이는 끝까지 금식을 해 냈습니다. 주변에서는 약을 올리려고 더 냄새를 풍기고 먹으라고 유혹합니다. 그렇게 딸아이를 유혹했던 내가 얼마나 부끄러운지 어린 딸만 못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이 더욱 부끄럽게 합니다. ‘야, 아빠도 옛 날에는 3일 금식 7일 금식 잘 했는데 지금은 나이 먹고 약해 지니 밥 굶는 건 못하겠드라, 너도 나이 먹어 봐라’라고 말입니다. 금식을 했느냐? 못 하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가르쳐 놓고, 정작 그 의미까지 잃어버린 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갈수록 부활절 연합예배에 참석하는 수가 줄어가고, 개교회에서 조차 고난 주간 집회나 예배에 참여하는 인원이 줄어 가고 있다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 모두가 믿으면 구원 받는 다는 그 진리 하나로 모든 신앙 생활과 삶에 면죄부를 던져 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됩니다. 주님의 고난에 동참한다고 하는 것은 한 순간 십자가에 달리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당하신 고난을 마음 속 깊이 생각하고 그 주간의 삶을 절제하며, 부활의 날을 사모함으로 맞이 하는 것 입니다. 이것은 구원을 받느냐, 그렇지 못하느냐는 것과는 다른 차원의 것입니다.

내가 정말 나를 위해 죄도 없고 흠도 없으신 분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어 주셨다는 것을 믿는다고 하면, 그리고 그것을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갖는다고 하면 그 시간을 육신을 즐기는 시간과 바꾸지는 못할 것입니다. 부활 신앙은 단순히 머리로, 지식적으로 알거나 환상적으로 느끼는 그런 믿음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100% 믿고 그분의 나를 향한 사랑하심과 선하심을 늘 확신하며 그 분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것입니다.

다시 주님 앞에 서는 날, 만들어진 이야기일지 모르는 '백합의 고개 숙인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먼저 주님의 고난을 기억하고 삽시다. 그리고 그 고난에 동참합시다. 그 고난에 동참할 때 진정한 부활의 영광과 그 분이 주시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영원한 축복을 부끄럼 없이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