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틀랜타 한국 학교에서 발행한 교지 19호 ‘개교 20주년 기념 우리들 얘기(2000년~2001년)’에는 한국 학교의 역사에 대하여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이 자료에서는 현재 애틀랜타 한국 학교에서 약 400명의 학생이 28학급에서 39명의 지도로 공부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2001년 7월 개교 20주년 기념 역대 교장-이사장 좌담회에서 한국 학교를 개관하기 위해 공간을 얻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은 얘기들이 언급되어 있다. 그 중에서 몇 분의 증언을 여기에 싣는다.

송종규(제 1대 교장): 지금 생각나는 것은 처음 한국 학교 수업 장소를 찾기 위하여 김경숙 선생님과 디케이터에 있는 어느 미국 교회 목사님을 방문했을 때였어요. 목사님이 렌트비부터 갖고 오라고 하여 청소, 수도, 전기비는 지불하겠다고 했더니 안된다고 했어요. 그래서 김경숙 선생님이랑 잔디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으면서 한숨을 쉬었어요.

그 후 열두서너 번 퇴짜를 맞고 나니, 난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요. 다른 방도가 없어 힘을 내어 또 다른 교회에 가 부탁했더니, 마침 교회 담당자가 한국 전쟁에 다녀온 분이라 이해를 하고 긍정적으로 허락해 줘서 그 곳이 첫 한국 학교 수업장소가 되었어요. 하이 뮤지움 옆에 있는 아주 좋은 First Presbyterian Church였지요. 그런데 한달도 못가서 아이들이 콜라를 엎는 등 교회를 더럽혀서 결국은 쫓겨났지요. 그 후 참으로 많은 곳을 찾아 헤맸어요. 마지막으로 간 곳이 다운타운에 있는 교회인데 Atlanta Baptist Tabernacle이었어요.

이영복(제 2대 이사장): 그 때 제가 소개하고 모시고 갔는 데, 너무 감사한 일이예요. 렌트비도 안받고 교육관까지 다 빌려주겠다고 했어요. Mr. Sarratt이 자기 개인 일도 다 팽개치고 헌신적으로 도와주었지요. 애들이 뛰어다니고 어지럽혀도 조금도 불평 없이 도와주었어요. 그 당시 무에서 유를 만드느라 초창기에 참여한 분들은 고생이 참 많았어요.

사회: 학교 발기위원장과 3대 교장 선생님을 해주신 방창모 교수님께 초창기의 이야기를 부탁드립니다.

방창모(발기위원회 위원장, 제 3대 교장): 내가 보람을 느낀 것은 내가 70년 살아오는 동안에 그 때 진실한 사랑을 실천하시는 분을 만났다는 것입니다. 그가 아까 얘기 나왔던 Mr. Sarratt입니다. 나중에 기회가 되어 보답을 하고자 했더니 굳이 사양을 하더라고요. 참 인상적이었어요. 다른 하나는 3대 교장으로 있으면서 교지 창간호를 냈어요. 마침 우리 집에 카피머신이 있어서 밤을 새워가며 타이핑하고 복사해서 책을 만들었어요. 오늘 교지 18호를 보니까 정말 많이 발전을 했군요. 대단히 기쁩니다. 수고들 많이 하신 것 같아요.

김태형(제 2대 교장): 한국 학교가 Atlanta Baptist Tabernacle에 있을 때에 송종규 교장이 나에게 교장직을 물려 주셨는 데, 저도 Mr. Sarratt이 제일 많이 생각납니다. 아이들이 책상을 부수고 난리가 나서 찾아가 미안하다고 사과를 했더니 그 분 말씀이 “이 세상의 모든 것과 교회 안의 모든 물건이 다 하나님의 것이고 교회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니니 교회나 나에게 미안해하지 말라”고 하셨어요. 아주 많은 감동을 받았어요.

이영복: 네 저 보고 종치는 사람이라고 하던 아이들이 지금은 거의 다 대학을 졸업했어요. 학교 정관도 제 손으로 처음 썼습니다. 그 후 수정이 많이 되었지요. 오늘 이렇게 발전한 걸 보니 감개무량합니다. 이런 자리를 무척 기다렸습니다.
사회: 다음에는 8대 교장이셨던 지혜정 선생님께서 좋은 말씀 좀 해주세요.

지혜정(제 8대 교장): 제가 교장을 맡자마자 Mr. Sarratt이 저를 불러서 다음 학년도에는 나가야 된다고 했어요. 교장이 되자마자 나가야 된다는 얘기를 듣고 김용건 이사장님과 함께 앞이 깜깜했어요. 미국 교회도 다 알아보신 상태라는 걸 알고 있었죠.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서 도와주셨다고 생각해요. 그 무렵에 천주교 성당이 디케이터에서 지금의 장소로 이사를 한 후였고, 저는 영세를 받고 난 바로 후였고요. 신부님께 부탁을 드렸더니 천주교 교육관을 빌려주겠다고 오라고 하셨죠. 트레일러를 사서 교실과 교무실로 사용했지요. 학교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에 참 감사를 드려요. 그 신부님이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갔는 데, 어려운 일이 있을 때마다 신부님을 찾아갔더니 나중에 신부님께서 “나는 학교 소사인가요?”하시더라고요.

그 때 힘들기도 했지만 아이들이 더 많아지고 선생님들도 좋았지요. 저는 그 2년이 참 기억에 남아요. 1993년에 처음으로 화랑 학교와 자매 결연을 맺었어요. 참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국에서 일부러 찾아오셔서 미국에 한국 학교가 굉장히 많은 데 특히 애틀랜타의 한국 학교가 아주 잘된다는 걸 듣고 왔다고 그러셨어요. 참 보람을 느끼고 기뻤습니다.

그런데 위에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1981년 7월 애틀랜타 한국 학교가 개관하기 이전에도 애틀랜타 한국 학교가 현재의 애틀랜타 한국 학교오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을 뿐이다. 1978년 7월 24일 발행한 한국일보 미주뉴스에도 애틀랜타 한국학교에 관한 기사를 다음과 같이 싣고 있다.

애틀랜타 한국 학교는 1978년 7월 8일 오전 10시 장로 교회 강당에서 32명의 학생이 참석한 가운데 백옥선 교사의 지도로 개강하였다. 하계 한글 학교는 애틀랜타 총영사관과 한인회의 후원으로 애틀랜타 지역 각 교회가 협력하고 있다. 개강식에는 총영사관의 김석현 총영사 직무대리가 이상철 부영사와 함께 참석하였고, 한국 학교 교장 백용환 씨가 인사말을 하였다. 이 날 한국학교 어린이들은 3개 반으로 편성되어 우리말과 한글 기초를 공부하였다. 매주 토요일 실시되는 한국 학교는 현재 등록을 하지 않은 어린이들의 등록을 바라고 있다.

이어서 1978년 9월 6일 발행한 한국일보에는 애틀랜타 여름 한국 학교의 수료식에 대한 기사를 싣고 있다.

애틀랜타 한국 학교(교장 백용환)에서는 1978뇬 8월 26일 오전 11시 노스 애비뉴(North Avenue)에 있는 장로 교회 강당에서 제 4회 어린이 하계 한글 학교 수료식을 거행하였다. 이번 하계 학교에서는 어린이 36명이 8주간(토요일만 3시간씩 개강)에 걸쳐 우리말을 배워왔는데, 이 날 수료식에서 어린 학생들은 그동안 배운 동요와 우리말 노래를 불렀고 이어 고전 무용을 추어 학부모들로부터 박수 갈채를 받았다. 특히 올해 만 4세된 백선영(여) 어린이가 태극기 노래를 우리말로 불러 학부모들의 마음을 흐뭇하게 하였고, 한글 교육의 필요성과 가르치면 된다는 확신을 얻게 하였다.

이날 수료식은 서홍식 박사의 사회로 진행되었는 데 백용환 한국 학교 교장은 수료식 인사말에서 앞으로 매년 여름방학만 개학하던 한글학교를 겨울방학에도 계속적으로 하겠다고 말했으며, 매년 학생들도 늘어가고 또 한국 학교에 대한 학부모들의 관심도가 높아져 더욱 용기를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 수료식에는 안영철 애틀랜타 총영사가 백옥선 교사에게 표창장을 수여하였으며, 전 한인회장 김창명 씨와 천주 교회 서베니또 신부를 비롯하여 각 교회 담임목사들이 참석하였다.

1980년 9월 4일 한국일보 애틀랜타 지국 보도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게재되어 있다.

미 남부지역을 관장하는 애틀랜타 총영사관의 안영철 총영사는 지난 8월 중순 각 지역 한인회에서 개최한 8-15 광복절 행사에 참가한 후 각 지역 한국 학교를 방문하고 애틀랜타에 돌왕ㅆ다. 안 총영사는 미 동남부 지역의 한인회 가운데 한국 학교를 운영하고 있지 않은 한인회에는 1981년부터 한국 학교 운영 예산을 책정하지 않고, 실질적으로 한글 학교를 운영하는 지역에 예산을 증가 책정하겠다고 했다. 이어 안 총영사는 애틀랜타 지역의 한인회에 1980년도 한글학교 예산 750달러를 책정하여 전달하였는 데, 한국 학교를 운영하지 않아 1981년도부터는 애틀랜타 지역 학국학교를 위한 예산을 배정하지 않고 타지역 한국 학교로 배정하게 된다.

애틀랜타ㅏ에는 1977년도부터 한국 학교를 한미 문화 협회(회장 이봉호)에서 시작 발족시켜 1978년까지 운영하여 왔는 데, 1979년 여상권 한국 학교 이사장이 사망한 후 백용환 애틀랜타 한국 학교 교장이 재건하여고 하였으나 여러가지 사정에 의해 약 2년 간 방치되었다. 1980년도 초 김학봉 한인회장이 한글 학교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역시 1980년 9월까지 부활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