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문호 도스토 에프스키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는 희망 없이는 살 수 없다. 희망 없이 산다는 것은 삶을 중단하겠다는 것과 같다." 살아있기 때문에 희망이 있는 것이 아니라 희망이 있기 때문에 사는 것입니다. 희망은 다른 생존조건이상의 생존 조건이 되는 것입니다. 의식주 문제를 비롯해서 육신적인 모든 필요가 채워진다 해도 희망 없이 살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희망은 오히려 모든 조건이 열악한 상황일수록 절대 필요한 생존의 조건이 됩니다.

세계 도처에서 수많은 전사자와 부상자를 속출케 한 2차 세계대전 당시 무려 2만 명의 미군이 일본에 포로로 잡혀있었습니다. 전쟁 당사국 피차간에 천문학적 재산 피해와 인명피해가 발생한 가운데 2차 세계대전이 끝났습니다. 전쟁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면서 패배한 일본에 붙잡혀 있던 포로들이 석방되었습니다. 2만 여명의 포로 중 8000명이나 되는 많은 인원이 전쟁이 끝나기 전에 사망한 것이 석방과정에서 드러났습니다.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인 미 국방성은 조사단을 파견하여 정밀조사에 들어갔습니다. 밝혀진 사망원인은 굶주림에 의한 것도, 모진 고문과 학대에 의한 것도, 질병에 의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절망 때문이었습니다. 포로들이 생존자와 사망자로 나뉘어 지게 된 원인이 희망여부에 있었습니다. 집에 돌아갈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살아남을 희망을 잃으면서 모든 것을 잃고 생명까지 상실했던 것입니다. 희망을 포기한 사람은 영원히 집에 돌아가지 못한 것입니다.

같은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유대인들은 독일 나치의 압제 하에서 모진 고통을 당했습니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6백만 명이나 되는 많은 인명이 희생되었습니다. 전혀 끝이 안 보이는 절망 속에서 살아야 했던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의 증언입니다. 처형을 위해 가스실로 보내지는 선택기준이 있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입니다. 자세와 표정 등을 관찰하여 생기를 상실한 사람부터 불러가는 것이었습니다. 평상시도 마찬가지지만 감시원들 앞에서는 더욱 생기를 잃지 않은 모습을 유지했다는 것입니다. 절망하지 않는다면 정상이 아닌 상황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 전쟁이 끝난 후 아우슈비츠 수용소가 공개되면서 밝혀졌습니다. 그들이 수감되었던 감방의 콘크리트 벽에 많은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우리는 저 태양을 볼 수는 없지만, 분명 저 하늘에 태양이 빛나고 있음을 믿는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침묵하고 계시는 것처럼 보이지만 우리를 위해 지금도 일하고 계신다는 것을 믿는다." 지하 감방 콘크리트 벽에 손톱으로 긁어 새긴 글귀에는 그들의 피맺힌 염원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가장 길고 참혹한 절망의 세월을 보낸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희망은 막연한 기대나 상상이 아닙니다. 실제적인 삶의 동기요 원동력입니다. 불가능한 상황을 뛰어넘어 가능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하는 희망은 육신적인 것이나 물리적인 것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습니다. 영원하시며 전능하신 하나님만이 모든 상황에서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희망이 되십니다. 덴마크의 철학자요, 신학자인 키에르케 고르는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하지 않는 한 어떤 상황도 어떤 문제도 어느 누구도 우리를 파멸시키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절망은 모든 가능성을 포기하고 하나님까지 포기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포기한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은 죽은 하나님, 존재하지 않는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이 영원한 희망이 되심을 실제로 입증한 사건이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우리의 부활을 말합니다. 마지막 절망이 죽음입니다. 죽음까지 이긴 부활의 능력이, 우리에게 있는 희망의 능력입니다. 부활의 생명이 함께하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절망을 희망으로 바꾸는 능력을 가진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