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960년대 후반의 한인 생활
박유순씨는 이대 간호학과를 졸업하고 로타리 클럽 장학생으로 1966년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66년 2월 1일 신시내티로 와서 1966년 3월 에모리 대학으로 왔다. 이미 오빠가 먼저 조지아 텍에서 공부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은 편안한 마음이었다고 한다. 의사로서 현재 활동 중인 장명용씨는 1967년에 애틀랜타에 왔다. 장명용씨는 의사 트레이닝을 하던 중에 박유순씨를 만나 결혼하였다. 장명용씨는 현재 노스사이드 병원 병리학과에서 일하고 있다. 1966년에는 김순응 의사(제1대 한인회장, 현재 고인, 김순응씨 부인은 보스턴에 거주)가 애틀랜타에 정착하였다.

1966년 에모리 대학에는 남기철(신학대 박사과정), 조종남(신학대), 한완상(결혼한다고 한국에 가 있었음), 이상섭(영문학과)씨가 있었다. 그리고 임희섭이 조금 늦게 왔고, 간호학과 전산초(작고)의 막내 동생 전상휘가 있었고 이은호(조지아 스테이트 대학에서 정치학과로 트랜스퍼), 박종민(화학), 김문옥, 송준희(C&S 은행), 빼빼송(조지아 스테이트 대학의 유학생: 다들 그렇게 불렀기 때문에 잘 모르지만 아마도 송철영씨를 그렇게 불렀을 것이라고 추측함)이 있었다. 빼빼송은 당시 Rich’s 백화점의 매니저로 있었다. 조지아 스테이트 대학은 야간대학이었다. 당시 조지아 텍에는 10명의 한인 유학생이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의 유학생 중에는 자동차가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에모리 대학생들은 가깝게는 총장 공관의 뜰로 야유회(피크닉)를 가곤 했다. 음식이며 기타 여러가지들을 자전거에 싣고 삼삼오오 얘기를 하며 따라갔다. 그 무렵에 김순응 교수가 처음으로 차를 구입하였다고 한다.

전반적으로 에모리 대학 학생들과 조지아 텍 학생들 사이에 긴밀한 유대 관계는 없었지만 가끔 금요일과 토요일이면 양쪽 학생들이 탁구 대회를 열었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미혼이었지만, 신학대학 유학생 중에는 부부나 가족 유학생들이 많았다. 미혼 학생들은 기혼 학생들의 신세를 많이 지곤 했다. 당시의 미혼 학생들은 기혼 학생들 집에 놀라가서 한식 등을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 무렵 신학대학 채플실에서 예배를 봤는데 처음에는 조종남 목사가 보다가 다음에는 남기철 목사와 문희석(문사이러스) 목사가 예배를 인도했다. 김종순씨는 에모리 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마치고 UGA에서 박사 학위(Ph. D)를 마쳤다. 조지아 텍의 학생이었던 황요연씨는 후에 애틀랜타 한인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지금은 오하이오 주에 거주하고 있다.

1969년에는 애틀랜타에 한국 음식점이나 한국 식품점이 없었다. 다만, 지금의 벅헤드(Buckhead)에 있는 미국인이 경영하는 골동품상(Antique Shop)에서 일본에서 만든 김치 통조림과 라면을 팔고 있었다. 어떤 한인들은 이것을 하와이에서 수입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 김치는 한국 음식을 그리워하는 미혼 학생 등에게 아주 요긴한 구매품이었다. 대개의 가정에서는 김치나 고추장을 한국에서 가져오거나 혹은 로스앤젤레스나 뉴욕 등지에서 조달하여 먹었다. 그래서 그 시기에는 김치나 고추장이 미국 공항에서 폭발하여 사고를 내는 일이 종종 있었다. 김치나 고추장이 폭발하면 미국 공항의 직원들은 그것을 마치 폭발물을 다루듯 소동을 피우곤 하였다(김선희씨 한인 초청 간담회 증언).

당시 애틀랜타에 영사관이 없었기 때문에 시카고에 새로 부임한 신임 영사가 애틀랜타를 방문하기로 했었다. 그래서 모든 한인들이 한복을 입고 공항에 마중을 나갔는데 그만 취소가 되어 아주 아쉬워한 적이 있다고 한다. 당시 에모리 대학의 유학생들은 기혼 학생으로 가정이 있는 경우가 많았는데 조지아 테에는 미혼 남학생들이 많았다. 연말이면 갈 곳이 없는 미혼 학생들이 남치철 목사 댁이나 김순응 교수 댁에 모여 송년회를 열곤 했다.

쌀을 A&P에서 사 먹었는데, 한인의 입맛에 맞는 쌀이 없었기 때문에 미디엄 그레인 쌀을 사 먹었다. 피드몬트에 있는 가게에서 중국식의 긴 배추를 사다 먹었고, 벅헤드의 일본 식당에서 멸치, 김, 당면을 사 먹으면서 한국 음식의 향수를 달래곤 했다. 안수웅 의사는 1964년에 애틀랜타에 들어와 트레포드에서 트레이닝을 받고 있었다. 방창모 교수(현 에모리 대학 수학과 교수)는 36세 나이로 1966년 내슈빌 밴더빌트 대학으로 유학을 왔고, 그로부터 6개월 후 아이 넷을 데리고 부인 김천숙씨가 합류했으며, 이들은 1969년 8월 28일 애틀랜타로 이주해 왔다. 김선희 의사는 1969년에 애틀랜타에 정착하였다.

애틀랜타 한인회는 1968년 10월 3일 개천절에 Decatur YMCA에 마련한 공간에서 약 20명이 참가하여 창립 총회를 개최하고 한인회 정관을 채택함으로써 출발하였다. 초기 한인회의 활동 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야유회나 체육대회, 혹은 망년회를 준비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한인회 기능은 한인회가 창립된 이후에도 10여년 이상 지속되었다. 야유회 혹은 망년회에서는 한인회 정기 총회를 겸하여 한인회 임원진도 선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