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 1편 1절에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리에 앉지 아니하며 라 하여 이 짧은 한 구절에 ‘아니하며’라는 말이 세 번이나 반복에서 강조되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복 받은 자가 취할 행동강령이다.

그런데 오늘날 이 아니하여야 할 행동강령이 무시되고 오히려 이를 용납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악인의 꾀를 좇아 살아도 때에 따라서는 환경에 따라서는 할 수 없다고 용인할 뿐 아니라 적극적으로 악인의 꾀에 좇는 일에 동참하고, 죄인의 길에 서서 앞장서는 일들을 본다.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는 일들은 아주 흔한 일들이 되었다. 그러므로 복 받은 자들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복 받은 자의 행동강령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것이 개혁주의 신앙의 요체이다.

그런데 이 아니하며에 언급된 세 동사들은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즉, '좇다', '서다', '앉다'는 말들은 죄의 점진적인 과정을 시사해 주고 있는바, 참으로 오늘날의 조폭세계에 대한 예언적 말씀인 것 같다. 처음에 조폭세계에 발을 들여 놓는 자는 조폭들을 좇게 되는 일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협박에 못 이겨 조폭세계에 발을 들여 놓지만 오늘날 좋아서 능동적으로 소위 오야붕의 뒤를 좇게 되는 일이 태반이란다. 다음으로는 저들과 함께 서게 된다. 조폭영화을 보면 우두머리가 출입할 때 양옆으로 도열하여 90도로 인사하면서 형님 어쩌구 저쩌구 하지 않는가? 그리고 얼마 지나가면 똘마니가 조무래기가 되고 그 조무래기가 중간 보스가 되고 해서는 소위 조폭의 두목급이 되어 서는 자리에서 점차 말석이라도 앉게 되고 점차 상좌를 향해 나가서 이 자리 저 자리에 앉게 된다. 참으로 죄의 장성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런데 혹여라도 이런 조폭세계의 질서가 교계안에서도 원용되고 있다면 통탄할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교계 정치가 패거리로 좇게하고 줄 세워 서게 하고 한 동아리 자리에 앉지 않으면 교권의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한다면 이는 조폭과 다를 바가 없다. 행동 불량한 지도자 밑에 진정으로 복된 그대들이여! 라고 영탄으로 축복할 수 있는 교인들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럼에도 한국 교회나 이민교회나 신년초에 복 설교가 주류였을 것이다. 참으로 자가당착도 유만부득이다. 어느 개그맨의 말대로 하면 어따대고 복을 들이대냐?고 일갈 받을 일이다. 이제 하나님의 복을 세상의 싸구려 복으로 만드는 일들에 종지부를 찍자!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자들과 한 패가 되어 그들을 따르고 그들의 자리에 서고 앉고 해서 세상의 복을 쟁취함에도 당신은 복 받은 자 입니다. 라 하면 부화뇌동(附和雷同)죄이다. 이제 순교적 정신을 가지고 당신은 망할 자입니다. 일갈하여 정신 버쩍들게 하는 오늘날의 나단들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