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본지는 워싱턴 지역의 한인교회들이 초창기 한인교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도록 김택용 목사의 글을 연재한다. 김택용 목사는 1976-77년 제2대 워싱턴지역 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워싱턴교계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김택용 목사는 현재 워싱턴한인장로교회 원로목사이며 워싱턴 신학교 학장을 맡고 있다.

김 목사는 워싱턴한인사회의 시작과 발전-역사 이전의 한인교회, 초창기 한인교회 12교회, 초창기 교회 통합 운동과 초기 교회 연합사업 등에 대해서 집필했다.


3. 초창기의 한인교회들

1)최초의 한인교회-화부 한인교회

1950년 한국에서 6.25 전쟁의 발발은 한국의 앞날을 위해 기도하여야 한다는 신앙적 자각 의식과 피난민을 도와야 한다는 동포애 속에서 워싱턴에 한인교회를 세우자는 기운이 무르익어 가고 있었다. 때마침, 1951년 봄, 하와이에 있던 김태묵 목사가 워싱턴으로 이주하여 왔다. 김태묵 목사는 하와이에 거주 할 때에 “하와이한인기독교회”에서 목회한 바가 있었다. 그렇게 한인교회 목회의 경험이 있는 지도자를 만나게 된 워싱턴 교계에는 교회 태동의 새 날이 밝아 오고 있었던 것이다. 드디어 당시 미주 구매 관으로 있던 박원규씨가 앞장을 섰다. 그는 김태묵 목사와 교회 설립에 대한 구체적인 의논을 하게 되었으며 한인교회의 진로 등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였다.

나름대로 격식을 갖춘 교회를 시작하려면 예배 처소가 있어야 했다. 매 주일 정기적으로 예배를 드리려면 확정된 예배 처소가 필요한데 자체적으로는 해결 할만한 힘이 없기 때문에 미주의 다른 지역에서처럼, 미국교회를 예배 처소로 빌어 사용하는 것이 최선의 방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김태묵, 방원규 두 사람은 당시 Connecticut Avenue와 N Street, NW, Washington, DC에 위치하고 있는 National Presbyterian Church 를 찾아 갔다. 그들이 우선적으로 그 장로교회를 찾아 간 것은 이유는 두 사람이 모두 장로교 교인이었고 또 한인교회를 설립하려는 뜻을 가진 구성원들의 상당수가 장로교인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 때 National 장로교회를 담임하고 있던 이는 Ellison 목사였다.

두 사람은 Ellison 목사에게 한인교회를 시작하려고 하니 예배장소를 제공해 주면 고맙겠다는 간절한 호소를 전했다. 그런데 이에 대해 Ellison 목사는 뜻 밖의 반응을 보였다. Ellison 목사는 말하기를 “미국에서 소수민족을 위한 독립교회를 세우는 것보다는 그들이 현지 미국교회에 참석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는 장기적인 안목으로 보면, 소수 민족교회의 장래성이 의문시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Ellison 목사의 그러한 답변은 “외국인이 미국 와서 자기들의 말로 따로 예배드리는 것은 허락할 수 없다. 그 대신 누구를 막론하고 장로교회에서 모두 영어로 함께 예배를 드린다”는 연합장로교회(United Presbyterian Church)교단의 “소수 민족 선교 정책”에 근거한 것이었다. 결국, 기대를 가지고 갔던 두 사람은 좌절감을 안고 돌아설 수 밖에 없었다.

교회설립 추진 위원들이 실의에 빠져 있을 때에 Washington DC에 위치하고 있는 Foundry United Methodist Church의 담임 목회자 Frederick Harris 목사로부터 메시지가 전달 되어왔다. Harris 목사는 워싱턴에 있는 한국인들이 예배드릴 장소를 찾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바가 있다고 말하고 “한인들이 원한다면 자기 교회를 예배 처소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그 교회는 1500 16th Street 과 P Street, NW, Washington, DC에 위치하고 있는 교회였다. 감리회 총회의 개방적인 흐름이 그런 결정을 내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다른 면에서는 일찍이 이승만 박사가 그 교회에 출석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도움이 된 것이었다.

1942년 2월 27일-3월 1일에 워싱턴 라파엣 호텔에서 개최되었던 한족대회의 순서지를 보면 이승만 박사가 한족대회의 회장이었고 Foundry 감리교회 목사가 축도를 하였다. 그리하여 Harris 목사는 보다 호의적이었으며 협조적이었다. 예배장소를 확보하게 된 준비 위원들은 힘을 얻게 되었으며 교회 설립추진 운동은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어 갔다.

기도와 준비 끝에, 1951년 10월 10일자로 교회 설립에 대한 초청장을 워싱턴 거주 한인들에게 발송하게 되었다. 초청장은 김태묵 목사와 박원규씨 그리고 고병철(유학생 대표)씨 등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고 교회 설립 예배가 10월 14일에 있을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드디어 1951년 10월 14일에 역사적인 날이 왔다. 이날 오후 3시에 감격적인 첫 예배가 상기 Foundry Methodist Church에서 드려졌다. 워싱턴지역 최초의 교회가 공식적으로 출범하게 된 것이었다. 이날 예배에 참석한 인원은 32명이었다. 예배 후에는 곧 사무 총회를 열어 담임 목사 김태묵, 재무 박원규, 통신 서기 고병철씨, 기록 서기 양기백(유학생)씨 등을 각각 선출하였다. 감리교회와의 인연을 통해 세워졌음으로 감리교회 소속교회가 되었으며 따라서 교회이름을 “화부한인 감리교회”라고 명명하였다. 워싱턴 지역 최초의 교회역사가 공식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1953년에는 오창희 목사가 사임한 김태묵 목사의 뒤를 이어 제 2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였고 1955년에는 김성덕 목사가 동사목사로 취임하였다. 그리고 1956년에는 황재경 목사가 제3대 담임 목사(처음에는 동사 목사로 시작)로 부임하였다. 1956년에 이르러 초교파적인 성격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교회명칭을 ‘감리’라는 말을 빼고 “화부 한인교회”로 개칭하였다. 1977년에 황재경 목사가 은퇴하고 1977년에 선윤경 목사가 제4대 담임 목사로 부임하였다. 1978년 1월 20일에 동 교회는 예배 장소를 Wisconsin Avenue, NW, Washington, DC에 있는 St. Luke U. M. Church로 이전하였다.(1981년에 제 5대 담임으로 박종렬 목사가 부임하였다. 현재는 김영봉 목사가 조영진 목사의 후임으로 담임하고 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