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처음 와서 신학대학원에 입학하여 공부를 할 때 놀라운 사실 하나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신학교 교수님들이 상당히 가난하게 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 분들의 학문적 배경을 보면 결코 가난하게 사실 분들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아주 검소하게 사시는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한번은 학기를 마치고 특별히 저를 아껴주신 기독교상담학 교수이신 라이져 교수님을 찾아가서 한국적인 정취가 풍기는 조그마한 꽃병을 하나 선물해드렸습니다. 그것을 받아든 교수님이 너무 감격해 하면서 연신 “탱큐”를 연발하시면서 그 꽃병 이름을 “소망의 꽃병”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처음에는 그 교수님이 왜 그런 이름을 지었는지 몰랐는데 몇 달이 지나서야 비로서 그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 교수님은 암 말기 상태로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는 상태였으나 매일 매일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감사하며 남은 생애를 살아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라이져 교수님에 대한 아름다운 기억이 하나 더 있습니다. 한번은 평소에 보지 못한 양복을 입고 강의실로 들어 오셔서 아주 들뜬 음성으로 자랑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지난 주말 하나님의 큰 은혜를 받아 감사했다. 아내와 함께 동네 거라지세일 하는 곳을 돌아보는 중에 내 몸에 꼭맞는 양복을 단돈 $5에 살 수 있었다. 내가 다른 미국 친구들에 비해 체구가 작기 때문에 내 몸에 맞는 옷을 구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데 지난 주말은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옷을 살 수 있어서 너무 기쁘고 감사하다!”

교수님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그 양복을 보니 세상에서 가장 고귀한 양복처럼 보였습니다. 우리 모두는 그 교수님의 마음이 진심인 것을 잘 알고 있기에 모두 축하해 주었습니다. 지금도 기억 속에 지워지지 않는 라이져 교수님은 감사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아가신 분이었습니다.

올해도 어김없어 추수감사절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감사절이 다가오면 무엇이 가장 먼저 떠오릅니까? 한 해 동안 감사한 일이나 고마운 사람들이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연휴'라는 생각이 먼저 떠오릅니다. 감사절에 감사가 먼저 생각나는 것이 아니라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이 먼저 생각납니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불행하게도 이 시대는 감사를 잊어버리고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한해를 인도하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
함께 가족을 이루어 살아가는 가족들을 향한 감사,
힘든 일을 같이 할 수 있었던 동료들을 향한 감사,

주님의 몸된 교회를 함게 섬길 수 있었던 성도들을 향한 감사가 사라지고
오직 자기 자신의 기쁨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감사절에 감사하는 마음이 생기기 보다는 오히려 불만이 생기고 불평이 더할 수밖에 없습니다.

감사는 큰 것부터 시작하지 않습니다. 지극히 작은 것보터 시작합니다.
감사는 멀리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곁에 있는 사람에게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물질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과 정성으로 하는 것입니다.
감사는 남이 먼저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먼저 하는 것입니다.
감사절에는 감사한 일을 먼저 떠올려야 제대로된 감사절을 보낼 수 있음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올해는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어렵다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우리의 현실은 실재로 피부로 느낄 정도로 어렵고 힘듭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감사를 말하는 것은 말장난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감사의 힘을 깨닫고 나면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감사는 상황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는 환경을 초월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나아가 감사하는 나 자신을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감사하는 마음은 전파되는 힘이 강하기 때문에 나로 부터 시작한 감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의 마음에도 감사가 넘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번 감사절에는 잃어버린 감사의 마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차고 넘기길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