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I. 몇 가지 고려할 점들

어거스틴 이래로 칼빈을 위시한 개혁자들(정통 기독교 내에서) 모두는, 그 누구도 칭의 구원만을 구원이라고 이야기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없다. 오히려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의 영원한 구원의 여정 중의 한 은혜의 특징적인 두 측면을 보여주는 것뿐이며, 오직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롭고 자유로운 선택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하나님의 영원하신 구원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연합하였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예정과 섭리를 따라 칭의와 성화와 영화의 은혜 가운데서 구원의 날을 반드시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칭의와 성화’를 가지고 닭이냐 달걀이냐 식의 논쟁을 할 이유가 없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은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의롭다 칭해지며, 칭하여진 그들은 필히 그리스도 안에서 성화의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높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만을 의지하는 그리스도의 사람들은 당연히 믿음으로 받은 칭의에 감사하며, 믿음으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가게 되어 있다.

실제적인 문제를 한번 짚고 마치려 한다. 칭의와 성화 모두가 은혜라고 하였는데, 그렇다면 성화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가 작용하는가? 성화란 죄 없는 거룩함을 말하는데, 이 땅에서 죄 없는 완전한 삶이 가능한가? 우리에게 성화의 삶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우선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된 이들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새로운 마음이 주어지며,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명령대로 순종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말한다. 이것은 전적으로 어거스틴의 생각과 동일하다.

타락 전 인간은 ‘죄를 지을 수 있는 상태’(posse peccare)였고, 타락 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 없는 상태’(non posse non peccare)였지만, 구속 후 인간은 ‘죄를 안 지을 수도 있는 상태’(posse non peccare)가 되고, 이후 영화롭게 된 후에는 ‘죄를 결코 범하지 않는 상태’(non posse peccare)가 된다고 하였다.

칼빈은 칭의 이후 신자는, 하나님이 주신 성령의 새로운 마음을 따라, 하나님의 법대로 순종할 은혜가 주어졌으며, 원하는 선을 행함으로 성화의 삶으로 나아간다고 했다.(기독교강요, II.3.10). 성경에 나타난 많은 하나님의 명령과 규례를 신자들이 능히 기뻐하고 지키고자 노력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 7장의 고뇌하는 바울의 모습을 두고 칼빈은 “죄가 항상 우리 안에 머물고 있다는 말을 들을 때에, 자기 기만에 빠지거나 자기의 죄악된 생활을 변명해서는 안된다. 이 말의 의도는 그렇지 않아도 죄를 짓기 쉬운 사람들이 안심하고 죄를 계속 지으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악 속에 거하지 않도록 더욱 경계하기 위함이다. 사실상 그렇게 고뇌하는 사람들은 오히려 신앙의 전진 중에 있음을 뜻하며, 이 말씀을 생각하여 성령의 음성을 순종하여 정욕이 매일 조금씩이라도 약화되면, 많은 진보가 이루어졌다고 생각하도록 하자. 그리고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곧 이 세상에서의 생명이 끝나는 순간까지 계속 전진해야 한다. 그 때까지 계속 씩씩하게 싸우며 전진하겠다는 의욕을 가지고 완전한 승리를 향해서 매진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