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I. 동일한 하나님의 은혜의 두 가지 모습: ‘칭의’와 ‘성화’

종교개혁 시대의 어떤 개혁가도 칭의와 성화를 다른 차원의 은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이신칭의’ 교리를 종교개혁의 뿌리로 놓은 마틴 루터까지도, 성화(선한 행위)에 관한한 누구보다 강하게 역설했다. 행위에 의한 칭의는 가장 악독한 성경의 왜곡이요 교황주의의 폐해이지만, 의롭다 한 신자들은 거룩의 열매를 맺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갈라디아서 5장 주석).

칼빈은 루터의 주장을 더욱 섬세히 다듬어서 ‘칭의와 성화’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한 은혜의 두 측면이라고 말했다. 단지 칭의와 성화를 병립시켜서 이것도 중요하고 저것도 중요하다식의 논의가 아니라, ‘칭의와 성화’는 한 은혜로 보아야 한다고 가르친 것이다.

칼빈의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분리해 나눌 수 없듯이 이 두 가지도 떼어놓을 수가 없다는 것은 우리가 그 둘을 함께 받기 때문이다. 곧 그 분 안에서 칭의와 성화를 한꺼번에 받기 때문이다”(기독교강요, III.11.6.).

물론 칼빈은 자신의 <기독교강요>에서 성화와 칭의를 각각 중요한 장으로 할애하여 설명한다. 이것은 각각의 독특한 구속사적 특징이 있기 때문이며, 구원의 여정에서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기 때문이지, 결코 다른 차원의 논의를 하지 않았다.

예를 들어, “칭의만 있으면 된다”라든지, “성화 없는 칭의는 구원 받지 못한다”라는 식의 논의는 칼빈에게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칭의의 은혜를 받은 자가 어찌 성화의 은혜가 없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 그리스도와 연합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의롭다 함과 거룩하심을 모두 은혜로 다 받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칭의와 성화를 그리스도 안에서 한 은혜로 보는 칼빈의 특징 때문에, 때로 그의 구원론은 ‘칭의’보다 오히려 ‘성화’에 더 강조점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하나님의 은혜로 의롭다 된 사람은 성화를 통해서 그 은혜의 선택 가운데 있음을 입증(signs-표지)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칼빈은 말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게하신 선한 일들 (성화의 열매들)은 양자의 영이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기독교강요, III.14.18).

또한 놀라운 것은 칼빈이 ‘성화’(sanctification)를 ‘칭의’(justification)보다 앞서(구원론 제일 서두에) 논의한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후에 칭의를 논하기에 앞서 이렇게 말한다: “… 내가 이렇게 성화(회개, 거듭남, 그리스도인의 삶)를 칭의에 앞서 논의한 이유는 칭의가 선한 행위들(성화의 그리스도인의 삶)과 분리되거나 결핍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함이다”(기독교강요, III.3.1.).

사실 칼빈만큼 그리스도인의 성화와 선한 행실 그리고 경건과 사랑에 대해서 신학적, 목회적으로 심혈을 기울였던 사람도 드물다. 칼빈주의에서 네델란드 경건주의와 청교도들이 파생되었다는 것은 전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은 가장 칼빈주의적인 고백으로 평가를 받고, 실제로 이 고백서의 저자들(Westminster Divines)은 칼빈주의의 예정, 구원론을 강력히 따르던 목회자들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칼빈 당대에도 개혁가들의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는 로마 교황주의자들에 의해 ‘믿음만 있고 사랑이 없는 파’, ‘칭의만 있고 성화가 없는 파’ 등으로 매도되었지만, 실상 칼빈은 칭의와 성화의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성경적, 신학적으로 재정립하여 제시한 개혁가였다.